"우린 신라인의 후예" 한국이 무시한 '오랑캐'의 진실
[김종성 기자]
▲ 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
ⓒ MBC |
지난 4일 첫 방송을 탄 MBC 사극 <연인>은 동아시아 최강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는 전환기를 배경으로 한다. 17세기에 벌어진 그런 변화 속에서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여진족이 강대국으로 급부상하는 그 시기에도 조선인들은 그들을 하찮은 오랑캐로 치부했다. 제1회 방영분의 37분경에 묘사된 장면이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주인공 유길채(안은진 분)의 첫사랑이자 전도유망한 청년 유생인 남연준(이학주 분)이 지역 선비들에게 상소문을 올리자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연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 모이셨으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중원에서 명나라와 후금 오랑캐가 싸우고 있는 것을 다들 아시지요? 헌데 오랑캐왕이 우리 임금께 보낸 글에 자신을 대청 황제라 칭하더니, 조선을 너희 나라라 불렀다 합니다.
헌데 조정에서는 명나라를 도와 오랑캐와 싸우기는커녕 오랑캐왕을 달래기 위해 사신을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하여, 오늘 스승님께서도 허락해주신 바, 우리들의 뜻을 모아 전하께 상소 올리고자 합니다."
이 장면은 훗날 한국에서 청나라로 불리게 될 대청(大淸)이란 국호가 사용된 직후를 배경으로 한다.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해는 광해군 집권기인 1616년이고, 그 아들 홍타이지(청태종)가 국호를 대청으로 바꾼 해는 인조 집권기인 1636년이다.
선비 남연준의 제창에 대해 청년 유생들은 격한 찬동을 표시했다. "너희 나라?", "뻔뻔한 오랑캐놈들 같으니!", "명나라를 도와 오랑캐에게 본때를 보여야지!" 등의 발언들이 튀어나왔다.
딱 한 사람, 이장현(남궁민 분)은 남다른 반응을 보였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그의 입에서는 "명나라가 반드시 오랑캐를 이긴다는 보장이 있소?"라는 말이 나왔다. 당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동맹국 명나라에 대한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 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
ⓒ MBC |
여진족을 혐오하고 야만시하는 장면은 오늘날의 한국 문화 곳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위와 같은 드라마 장면뿐 아니라 영화나 서적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이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그처럼 비하하는 여진족이 실은 우리와 아주 가깝다는 점이다. 고대에 이들은 우리와 동족이었고 발해 멸망 이전만 해도 한민족과 함께했던 말갈족의 후예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이해했다. 그는 여진족이 한민족과 하나의 '아'를 형성한 시기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조선상고사>에서 그는 "동족인 여진족"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신채호는 "고대 동아시아 종족은 우랄어족과 중국어족의 두 파로 나뉘었다"면서 "한족·묘족·요족 등은 후자에, 조선민족·흉노족은 전자에 속한다"라고 한 뒤 "조선민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골·퉁구스 등"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발해와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는 시기에, 말갈족에 들어가 이들을 여진족으로 재편한 인물이 있다. 신라 왕족 출신인 김함보가 그 주인공이다.
여진족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 청나라가 편찬한 <만주원류고>는 여진족 시조인 김함보가 신라인이라고 알려줬다. 청나라 정부가 관찬 역사서를 통해 '우리는 신라인의 후예'라고 공식 인정했던 것이다.
여진족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점은 몽골 원나라도 인정했다. 위의 <금사>는 금나라 정부가 편찬한 책이 아니라, 몽골 정부가 중국어로 편찬한 금나라 역사서다. 이 <금사>에 "금나라 시조는 김함보라고 불린다. 고려에서 왔다"라는 대목이 들어 있다. 신라 출신인 김함보는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에 말갈족에 들어갔다. 그래서 "신라에서 왔다"라고 하지 않고 "고려에서 왔다"라고 서술한 것이다.
이처럼 말갈족은 서기 10세기에 여진족으로 재편되면서 주류 한민족과 좀더 가까워졌다. 말갈족일 때보다도 여진족일 때에 혈통적으로 더 가까워졌던 것이다.
▲ 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
ⓒ MBC |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여진족을 야만시하고 천대한다. 지금뿐 아니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인>의 위 장면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은 중국은 친숙하게 생각하면서도 여진족은 한없이 무시했다. 여진족이 고대 한민족에서 분리됐을 뿐 아니라 고구려·발해 때까지만 해도 한 울타리에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야박한 대우였다.
한국인들이 여진족을 배척하는 것은 금나라와 청나라에 눌린 굴욕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업구조나 경제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농경문명을 발달시킨 주류 한민족과 달리 여진족은 농경문명보다는 유목문명에 훨씬 크게 의존했다.
한민족은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라며 그들을 천시했다. 수렵문명보다는 유목문명이 선진적이고 유목문명보다는 농경문명이 선진적이라는 인식이 이런 관념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목민이라는 이유로 무시해버리기에는 그들이 이룩한 객관적 결과물이 너무 거대하다. 김함보의 후손들이 왕실을 형성한 여진족은 고구려 광개토태왕도 진출하지 못한 중국 내륙으로 진입해 금나라라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금나라는 중국 전역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북중국을 지배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사회를 이끌었다.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금나라를 능가하는 결과물을 구축했다. 청나라는 북중국뿐 아니라 중국 전역을 통할했다. 13세기에 몽골 기마병이 동유럽과 중동까지 휩쓴 이후부터 1840년 아편전쟁에서 서유럽이 중국을 꺾기 이전까지는 동아시아 최강국의 권위에 필적할 강대국이 여타 지역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여진족 청나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이끌었다. 1840년 이전까지는 청나라가 세계 최강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청나라는 그런 결과를 거두는 과정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같은 치욕과 상처를 조선왕조에 안겼다. 그 이전의 금나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려왕조에 상당한 아픔을 안겼다. 그래서 금나라와 청나라의 성과를 평할 때는 그것이 고려와 조선에 미친 부정적 영향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 해도, 금나라나 청나라가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이 심대하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발해 멸망을 계기로 한민족과 말갈족(여진족)은 갈라졌다. 발해가 멸망한 것은 926년이다. 앞으로 3년 뒤면 1100주년이 된다. 한민족과 말갈족이 갈라진 것은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민족이나 문명의 분화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이처럼 '불과' 천년 전만 해도 한 식구였던 여진족이 지금은 남남이 되어 있다. 오늘날 그들의 역사는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로 취급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여진족의 역사도 자기네 역사였다면서 끌어들이고 있다. 그들이 유목민이고 전쟁의 상처를 입혔다는 등등의 이유로 한민족이 그들을 남남으로 다루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민족과 여진족이 남남처럼 인식되는 현상은 동족이 남남이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준다. <연인>이라는 드라마 제목처럼, 연인이 되고 하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지금은 같은 민족일지라도 어느 순간 이민족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선례다. 하나였던 민족이 갈라져 남남처럼 지내는 일은 대륙에서 당기는 힘과 해양에서 당기는 힘을 함께 받는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는 비교적 쉽게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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