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다이어리]무시할 수 없는 피치의 경고

뉴욕=조슬기나 2023. 8. 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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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미국 일상 속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지난주 미국 월가는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가 미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강등한 건으로 시끌시끌했다. 직후 월가에서 쏟아져 나온 의견들을 취합해보면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 미 금융시장이나 연방정부 차입능력에 미칠 여파는 제한적일 것이다. 두 번째, 경제 지표 등을 살필 때 강등을 결정한 시점이 뜬금없다. 세 번째, 피치가 지적한 국가부채 문제는 경계해야 한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12년 만의 신용등급 강등이 금융시장에 미칠 파장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월가의 전망은 현재까진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미 신용등급 강등이 안전자산인 미 국채의 입지를 뒤흔드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지난 며칠간 국채 금리는 장·단기물 혼조세 속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변동폭을 나타내다, 주 막판에는 하락세(채권 가격 상승)로 돌아섰다. 우려할 정도의 급격한 매도, 매수세는 확인되지 않았다. 뉴욕증시 역시 연일 하락세를 보이긴 했으나 단기적 이벤트로 끝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연방정부의 디폴트 예상일이 임박한 상황에서 S&P가 등급을 하향했던 2011년과 지금의 경제 여건이 현저히 다른 탓이다.

자칫 2011 데자뷔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해온 월가는 이제 피치의 경고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모습이다. 앞서 피치는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배경으로 미 연방정부 재정적자 한도 증액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 갈등, 재정악화, 국가채무 부담 등을 꼽았다. 피치에 따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025년까지 118%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AAA 등급을 받은 국가들의 중간값이 39%임을 고려할 때 약 3배 높은 수치다.

현지에서는 이번 강등이 '재정'적 측면만 따질 경우 오히려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말마저 나온다. 그만큼 미국의 국가부채 문제가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피치의 경고를 ‘회색코뿔소(발생 가능성과 파급력이 크지만 간과하는 리스크)’ 상황에 빗대며 향후 미국의 재정부담 문제가 더 부각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분명 피치의 강등 발표 시기는 이상했다”면서도 “국가 부채의 장기적인 궤적에 대한 우려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2011년 신용등급 강등 당시 S&P 평가 책임자였던 데이비드 비어스는 피치의 이번 결정이 정당하다는 입장도 내놨다. 그는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미국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이 12년 전 S&P의 강등 조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요인들을 연상시킨다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의 재정 악화와 국가채무 부담 등의 문제가 가속화하고 있다"며 정치권의 '벼랑 끝 전술' 등 일부 문제는 과거보다 더 악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피치의 이번 결정이 2011년 S&P의 결정을 다시 확인시켜준 것이라는 평가다.

비어스의 말처럼 막대한 부채, 점점 커지는 이자 부담, 베이비붐 은퇴에 따른 각종 사회보장 비용 급증 등이 미국 내 우려점으로 꼽힌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본연의 기능이 소멸된 정쟁 속에서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미 연방정부의 부채는 31조달러를 웃돈다. 부채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29년이면 제2차 세계대전 수준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미 의회예산국(CBO)에 따르면 2024 회계연도 순이자만 전체 재량지출(국방 제외)의 약 4분에 3에 해당하는 7450억달러로 추산된다.

관건은 이번 강등 사태가 미국 내 실질적인 개혁 노력으로 이어질지다. '과도한 지출, 감세, 정쟁에 따른 거버넌스 악화'로 요약되는 피치의 경고가 사실상 워싱턴 정가를 향한 경고임을 모두가 안다. 이번 사태는 기축통화국인 미국조차도 재정건전성이 나빠지면 국가 신인도 추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확인시켜줬다. 현지 경제전문가들과의 인터뷰 질문지에 늘 한국 가계부채 문제를 포함해왔던 한국인 기자에게 드는 생각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남의 일이 아니다.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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