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없애고 목에 걸고…선풍기 바람 바꾼 게임체인저 [비크닉]
집콕 필수템
엔데믹 후 첫 여름휴가 시즌이지만 ‘집콕'이 대세인가 봅니다. 올해 여름휴가 계획을 묻는 질문에 '집에서 보내겠다'는 답변이 1위를 기록했어요(컨슈머인사이트 조사, 성인 3419명 대상). 고물가로 지갑 열 엄두가 안나서일 수도 있겠지만, 폭염과 잦은 폭우 등 변화무쌍한 날씨 탓도 있겠죠.
오늘 비크닉은 전기료 부담이 적어 24시간 내내 함께 할 집콕 휴가 필수템, 선풍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TV, 냉장고, 휴대전화 등 우리 곁의 모든 제품처럼 선풍기도 오랜 세월을 지나며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답니다. 시대별로 선풍기 판을 바꿔온 게임체인저들을 소개할게요.
부의 상징이었던 1960년대 선풍기
선풍기가 '금(金)풍기'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 믿어지나요? 1960년대 후반까진 선풍기가 부의 상징이었답니다. 당시 한 대 가격은 쌀 다섯 가마니와 맞먹었거든요. 선풍기가 근로자 평균 월급보다 비쌌어요. 미제, 일제 선풍기는 이보다 두 배나 더 비싸서 외제를 사려면 두 달치 봉급을 털어도 모자랐죠.
1970년대 파란 날개, 클래식 선풍기 대중화
D-301은 단명했지만, 점차 국가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서 선풍기 대량 생산 시대가 열립니다. 1970~80년대에 클래식 선풍기가 집집마다 빠르게 보급돼요. 푸른 날개에 쇠로 된 촘촘한 보호망, 탁탁 돌아가는 타이머 버튼까지. 팬에 손가락을 넣으면 다칠 수 있어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선 그물망도 씌웠죠.
신일전자가 70년대 스타일로 재현한 탁상용 선풍기도 레트로 열풍을 타고 인기예요. 더 놀라운 건, 아직도 예전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신일전자 관계자는 "아직도 선풍기를 고치기 위해 회사로 직접 제품을 들고 찾아오는 고객들이 많다"며 "시원한 에어컨이 있어도 낡은 선풍기를 고쳐 쓰려는 건, 풍요롭진 않지만 따뜻한 정을 나누고 살았던 옛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어요.
2000년대, 값싼 중국산의 습격
국내 선풍기 시장의 특이점은 중견 가전기업의 장악력입니다. 신일전자(1위), 한일전기(2위) 등이 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거든요. 반면 대기업은 수십년간 중견기업의 벽을 넘지 못했어요. LG는 2005년 선풍기 사업에서 손을 뗐고, 삼성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죠.
업계 한 관계자는 "대기업들도 일찍부터 선풍기를 만들었지만, 오로지 선풍기 하나에 집중해 오랜 시간 모터, 날개 기술 개발 등 제품 연구・개발(R&D)을 지속해 시장에서 영향력을 높이는 중견기업들을 넘지 못했다"며 "대신 수익성이 높은 에어컨・세탁기・냉장고 등 대형가전 분야를 강화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택했다"고 설명했어요.
2000년대엔 잘나가던 선풍기 명가들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저렴한 중국산 제품이 습격한 겁니다. 일명 '깡통 모터'를 탑재한 저급한 제품뿐이라 판매량이 많진 않았지만, 국산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가격은 시장을 뒤흔들 수준의 충격파를 줬죠. 저가 중국산의 습격은 국내 선풍기 명가들이 믹서기, 청소기 등 소형 생활가전 시장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는 계기가 됐어요.
2009년, 날개 없는 다이슨 선풍기 등장
2000년대 후반엔 선풍기 디자인도 한층 진화합니다. 2009년 영국 가전기업 다이슨이 출시한 '날개 없는 선풍기'가 선발대였죠. 다이슨 선풍기는 본체 내에 있는 날개가 원형의 루프(loop)를 통해 바람을 분사하는 방식으로 선풍기 디자인의 틀을 깼어요.
다이슨은 '선풍기는 날개가 있어야 한다'는 통념을 뒤집은 동시에, 선풍기의 정의를 '공기의 흐름을 전달하는 제품'으로 바꿨어요. 이 제품이 출시되기 전까지 100여년간 시중에 판매돼 온 선풍기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디자인 일색이었거든요. 바람이 고르지 않게 분사되기도 했고, 어린 아이들이 선풍기 안으로 손을 넣으면 자칫 사고로 이어질 우려도 있었죠.
2013년 '강남 선풍기' 된 발뮤다 프리미엄 선풍기
다이슨이 전에는 없던 디자인으로 프리미엄 시장을 개척했다면, 일본 발뮤다는 '날개 있는' 선풍기 디자인의 고급화를 시도합니다. 2013년 국내에 출시한 제품이 일명 '강남 선풍기'로 유명세를 타면서 프리미엄 선풍기의 표준이 됐어요. 검은색과 흰색의 깔끔한 조화가 특색이죠.
발뮤다 선풍기하면 떼어놓을 수 없는 건 '저소음'입니다. 소음과 발열이 적으면서도 풍량을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BLDC 모터를 탑재한 것이 승부수였죠. 과거엔 AC(교류)모터나 DC(직류)모터를 탑재한 제품이 많았지만, 최근엔 발뮤다처럼 많은 선풍기 제조사들이 BLDC 모터 선풍기를 출시하고 있어요. 전력 소모도 적어 전기료 절감 효과도 있답니다.
출발점은 가까웠지만 다이슨과 발뮤다는 서로 다른 길을 가는 듯 해요. 다이슨의 날개 없는 선풍기는 이후 선풍기에 공기청정기와 가습 공기청정기 기능을 결합한 제품으로 진화했어요. 이젠 선풍기라기보다는 공기청정기에 가깝죠. 반면, 발뮤다는 선풍기 본연의 기능을 지키고 있어요.
2010년대 중반, 미국발 에어서큘레이터 인기몰이
선풍기도 점차 기능별로 분화했어요. 2010년대 중반부턴 에어서큘레이터(공기 순환기)가 인기몰이합니다. 선풍기와 비슷해 보여도 나선형 구조의 앞망, 블레이드, 가드링 측면 두께 등 선풍기와는 구조 자체가 다르죠. 3~4m의 짧고 넓은 패턴의 바람을 내보내는 선풍기와 달리, 에어서큘레이터는 15m 이상의 고속 직진성 바람을 내보내거든요.
예전엔 에어컨과 함께 사용하는 '보조 가전'이란 인식이 강했지만, 실내 온도를 균일하게 조절해 줘 쾌적한 공기를 느낄 수 있다는 입소문에 2020년엔 국내 판매량만 100만 대를 기록, 필수 가전으로 올라섰다는 평가입니다.
선풍기를 입다…손풍기, 목풍기에 발풍기까지
해를 거듭할수록 선풍기의 모습은 더 다양해지고 있어요. 2014년 등장한 손풍기(손선풍기)가 그 예입니다. 펜데믹으로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하면서 소비자들이 열광했고, 마스크를 벗은 후에도 그 인기는 여전합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손풍기는 지난해 국내에서 1000만대 이상 판매됐어요.
요즘 10~20대가 좋아하는 휴대용 선풍기는 목에 걸어 사용하는 목풍기(넥밴드형 선풍기)예요. 넥밴드 이어폰처럼 생긴 목풍기는 말 그대로 목에 걸어 사용할 수 있어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요. 가격은 1만원 중반대에서 4만원 후반대까지 다양하죠.
최근엔 책상 위에서 사용하는 USB 선풍기를 비롯해 발바닥으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나오는 발풍기도 등장했어요. 전원, 풍량, 회전 버튼을 손 대신 발로 터치해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죠. 앞으로 선풍기는 어디까지 진화할까요.
뱀발: 선풍기, 살인 누명을 벗다
선풍기 괴담, 들어본 적 있어요? 밀폐된 방에서 선풍기를 켜놓고 잠들면 산소가 부족해져 사망할 수 있다는, 우리나라에만 떠돌던 도시괴담이에요. 지금은 허무맹랑한 헛소리라는 걸 알지만, 예전엔 일반인이든 전문가든 너나할 것 없이 선풍기 괴담에 진심이었어요.
"선풍기를 켜 놓은 채 잠들었다가 사망한 사람이 벌써 4명이나 된다. 밀폐된 방에서 선풍기를 켜 놓고 잔다는 것은 일종의 자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덥더라도 선풍기를 켜 놓고 잠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스컴도 여러 번 경고했다" -1973년 7월 27일자 중앙일보 칼럼 '안전피서' 중에서
서울 모처에서 숨진 한 시민의 사망 원인이 선풍기 때문이었다는 기사(중앙일보, 1972년 7월 18일)를 읽어보면, 무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통풍이 잘 안 되는 방 안에서 오랫동안 선풍기를 틀어 놓으면 희(稀) 산소 현상으로 호흡에 심각한 장애를 줄 수도 있다’고 설명한 소견이 나와요. 서울 모 대학병원 의사도 “통풍이 안 된 방에서 선풍기를 틀고 잘 경우 산소결핍 현상인 ‘호흡성 산증(respiratory acidosis)’을 일으킬 수 있다"고 조언했어요.(중앙일보, 1973년 7월 27일)
'선풍기=질식사' 이론은 이후 30여년간 정설처럼 유지됐어요. 1999년 8월 10일자 중앙일보 '잠못 이루는 열대야 기승…선풍기 사망 잇따라' 기사를 끝으로 밀폐된 공간에서 선풍기를 켜 사망에 이르렀다는 기사는 쏙 사라집니다.
우린 이제 다 알죠. 선풍기와 질식사는 관련 없다는 걸요. 김대균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무더운 날씨가 심장에 부담을 줘 여름에 돌연사가 종종 발생하는데, 우연히 선풍기를 켜놨기 때문에 이런 속설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며 "선풍기를 튼다고 산소가 소모되는 게 아니므로 밀폐된 공간이라 해도 선풍기 때문에 질식한다는 우려는 근거가 없다"고 했어요. 다만, 실내에서 장시간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사용하면 호흡기 점막이 건조해지면서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조심은 해야겠어요.
박영민 기자 park.yungmin@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어폰과 헤드폰, 뭐 쓰죠…‘귀 박사’의 귀 지키는 꿀팁 | 중앙일보
- 수술할까 말까…'옆집 아줌마'에 묻지말고 '이 3명' 조언 귀 기울여라 | 중앙일보
- 선미도 반한 김덕배…신도림 조기축구회서 소주 원샷 한 까닭 | 중앙일보
- "깜빡깜빡, 기괴해"…美도심 한복판에 '111m 거대 눈알' 정체 | 중앙일보
- "보이는 사람 다 죽일겁니다"…에버랜드 간 자폐청소년 이런 글 올렸다 | 중앙일보
- "십만 년에 사고 1번 날까 말까"...韓 만들어 안전 최고등급 받았다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 중
- 형체도 없이 박살…버스 충돌한 택시, 뒤에서 승용차가 또 쾅 | 중앙일보
- 9세 때 美학교 변기만 닦았다…바이든 때린 '1조 달러 칩의 왕' [후후월드] | 중앙일보
- 19개월 인공 심장이 콩닥콩닥…'아기상어' 직접 부른 간호사 추진력 | 중앙일보
- 황희찬, 2023~24시즌 준비 끝...프리시즌 최종전서 골맛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