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헌법에 충성하는 공직자 보려면
윤석열 대통령이 2013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던진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금 생각해도 굉장하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8개월 된 시점이었다. 이후 정직 1개월의 중징계를 당하고 대구고검과 대전고검으로 인사 조치된 ‘검사 윤석열’을 많은 사람이 응원했다.
3년 뒤 ‘최순실 국정농단사건 특검팀’의 수사팀장을 맡고 문재인 정부에서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으로 연이어 파격 발탁될 때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회자했다. 검찰총장이 된 뒤엔 문 전 대통령이 아끼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강도 높게 수사하면서 빈말이 아님을 보여줬다.
청와대에 입성한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과 인사에 관심이 쏠렸다. 사람에 대한 충성을 배격한 지도자의 인선은 어떨까.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을 정치에 입문시킨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참신한 인사가 재현될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그러나 의외였다. 검찰 출신을 대거 기용했고 윤 대통령과 개인적 인연이 있는 인물들이 요직에 올랐다.
“나에게 충성 말고 헌법에 충성”
다시 언급한 윤 대통령의 소신
대통령이 된 뒤 생각이 달라진 것인지 의아해하던 차에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차관 인사를 하면서 “저에게 충성하지 말고 헌법 정신에 충성하라”는 말을 다시 꺼냈다.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발언이 유효하다니 다행이다.
공무원은 대통령의 말보다 행동에 더 민감하다. 말과 행동이 다른 선례가 많았던 탓이다. 가깝게는 취임사에서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있다. 임기 내내 여당(더불어민주당)은 국회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고 입법 폭주로 치달았다. 문 전 대통령의 ‘통합’은 신기루였다. 일방으로 밀어붙인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요즘 ‘검수원복’(검찰 수사권 원상 복구)으로 반격당하는 중이다.
이번 정부가 과거와 다르길 기대하는 사람들은 윤 대통령의 언행을 주목한다. 충성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면 무엇이어야 하나. "국가와 국민, 헌법 시스템에 충성해달라“는 게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의 설명이다.
지난 1년 3개월 동안 공직사회가 사람보다 헌법정신에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장 큰 사건인 이태원 참사를 보자. 159명이 희생됐는데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진 고위 공직자가 없다. 헌법 34조 6항은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25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해 “탄핵사유는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했다. 만장일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참사의 예방 및 대비, 사후 대응 과정에서의 미흡함을 반성”하라고 헌법재판관들은 지적했다. 과거 정부는 참사가 터지면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져왔다. “각 정부기관이 대규모 재난에 대한 통합 대응역량을 기르지 못했다"는 헌재의 지적처럼 참사는 여러 요인이 복합해 발생한다. 사회가 고도화할수록 책임이 여러 기관에 분산돼 어느 한쪽에만 법적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 현장의 실책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희석되기에 법만 따지면 하급자가 책임을 뒤집어쓰는 구조다. 위는 전부 빠져나간다. 어제 임성근 해병 제1사단장이 고 채수근 상병 순직 사고에 책임지겠다고 나선 게 이례적으로 느껴진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이후 서로 상대방 잘못을 들추며 책임 회피에 골몰하는 각 기관의 행태가 이번 정부에서 새로운 관행으로 정착할까 걱정스럽다.
반면 대통령의 지시를 어긴 공무원에겐 엄중한 조치가 따랐다. ‘공정 수능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능을 5개월 앞둔 시점에 교육부 국장이 경질되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사임했다. 조만간 장관 몇 명이 교체되리란 얘기가 나오는데 윤 대통령 관심 정책 추진이 부진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거론된다.
행동 뒷받침돼야 공직사회 변화
대통령이 진심을 담아 “나에게 충성하지 말고 헌법에 충성하라”고 얘기해도 이런 상황에선 먹히지 않을 우려가 있다. 재해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임무를 소홀히 한 공직자는 구두 질책뿐인 데 비해 대통령 지시에 소극적으로 임한 사람들은 인사 조치를 하면 공무원들은 헌법보다 대통령에 대한 충성이 더 긴요하다고 판단한다.
윤 대통령의 바람을 관철할 방법도 여기에 착안할 수 있다. 대통령의 지시를 어긴 공무원은 말로 꾸짖고, 재해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헌법적 의무를 소홀히 한 공무원은 엄중 문책하면 된다. 아마 모든 공직자가 먼지가 쌓인 헌법 책을 꺼내 들고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한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부터 꼼꼼히 읽어내려갈 것이다.
글=강주안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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