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요란한 더위도 용서 되는 맛

김현진 2023. 8. 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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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잘 살아온 우리 가족에게 선물 같은 과일, 복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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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기자]

어느 날 저녁 복숭아를 깎아 먹다 말했다.

"내 인생 최고 복숭아는 서윤이(딸아이)를 임신하던 해에 먹은 복숭아 같아.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복숭아가 달고 맛있었을까."

그해 여름 잠시 다녀온 유럽 여행에서 납작복숭아(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납작복숭아가 없었다)를 발견하고 우리 부부는 복숭아의 세계에 새롭게 눈을 떴다. 동네 슈퍼에 가면 손에 쏙 들어오는 작고 납작한 복숭아 대여섯 개를 3~4유로에 살 수 있었다.

딱딱한데 단맛이 진해 껍질을 깎지 않아도, 크기가 작아 칼로 자를 필요없이 손에 들고 베어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복숭아 때문인지, 그때 걸었던 소박하지만 정겨웠던 길 때문인지 여행 이후 우리의 최애 과일은 복숭아가 되었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복숭아 사랑은 이어졌다. 평범한 황도와 백도 밖에 선택지는 없었지만 여름밤을 보내기엔 충분했다. 부드럽고 단맛이 진한 황도는 남편 취향, 딱딱하면서 향이 진한 백도는 내 취향. 동네 마트에서 한 박스를 사다 한 알씩 깎아 먹으며 더운 여름날을 하나씩 지웠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납작복숭아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SNS에 뜨는 광고를 보고 클릭해 보았는데 가격에 놀라 후다닥 나왔다. 기억 속 납작복숭아는 못나고 흉도 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밭에서 막 따온 듯 싱싱한 과일, 너도 나도 손에 들고 먹는 친근한 과일이었는데. 그 맛이 그리웠지만 거금을 내고 손 떨며 먹고 싶지는 않았다.

몰랐는데 그 사이 다양한 종류의 복숭아가 시장에 나오고 있었다. 털이 있는 복숭아와 털이 없는 천도복숭아, 그리고 과육 색깔에 따라 백도와 황도로 나뉘고, 백도가 딱딱이 복숭아와 물복숭아로 구분되는 기본에는 변함없지만. 납작복숭아, 도넛복숭아처럼 모양이 조금 다른 복숭아도 있고 천도복숭아 외모에 백도 맛이 나는 신비복숭아나 망고 맛이 난다는 망고복숭아 등, 복숭아의 스팩트럼이 넓어졌다.

신비복숭아 먹던 초여름을 지나
 
▲ 복숭아 매년 여름 복숭아를 먹고 자란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사진은 아이가 세번째 맞던 여름에 찍은 복숭아
ⓒ 김현진
 
여름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초여름이라 부르는 싱그러운 기간에 이름도 신비로운 신비복숭아를 처음 접했다. 딱 2주 동안만 맛볼 수 있다는 귀한 과일. 남편은 가족들과 먹고 싶어서 주문했다고 했다. 매일 밤 두 알씩 잘라 셋이 나누어 먹었다.

"복숭아 먹을 사람?"

그러면 핸드폰을 보던 남편, 동영상을 보던 딸아이도 둥그런 식탁 주변으로 모였다. 노란 조명 아래 향긋한 과육을 꿀꺽 삼키며 서로가 서로의 곁에 이렇게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다.
  
8년 전 유난히 복숭아를 달게 먹었던 여름을 지나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 임신 소식을 들었다. 여름밤을 우리만의 낭만으로 물들여주던 복숭아가 뱃속에서 아가가 된 것 같아 신기했고. 복숭아야, 하고 부르던 태명은 '슝슝이'가 되었고 아가는 걷고 말할 무렵까지 이름대신 '슝슝아'라고 불렸다. 

아이가 자라던 여름마다 복숭아를 챙겨 먹었다. 아이를 낳은 첫 해 아이 보러 들르시는 친정 엄마 손에는 복숭아가 들려 있었다. 낮에 엄마가 복숭아를 사다 주신 줄 모르는 남편이 약속이라도 한 듯 퇴근길에 복숭아 한 상자를 똑같이 들고 오는 날도 있었고. 매년 복숭아를 먹는 순간을 일기장에 적으며 여름을 보냈다.

아이가 조금 자라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딱딱이를 좋아하는 내 입맛을 알아 남편이 딱복을 사 오면 아이가 맛을 보고 훈수를 두기도 했다. "아니, 이거 말고, 노란 거를 사야지~" 그러면 너도 물복파구나 하면서 '하하하하' 웃음꽃을 터뜨렸고. '복숭아를 많이 먹었더니 네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자란 아이는 지금도 자신이 복숭아에서 만들어진 줄 안다.

무탈하게 서로의 곁에 있는 것으로 감사한 요즘
 
 물봉인 줄 알았는데 딱봉.
ⓒ 최은경
 
그렇게 일곱 번의 여름을 무사히 지나며 어느새 복숭아는 부적 같은 과일이 되었다. 작고 고운 복숭아 한 알에 위로받는 저녁이 쌓였다. 세 식구 모여 복숭아를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다 괜찮을 것 같다고. 한 해 잘 살아 여기 왔구나, 아이는 무탈하게 잘 자라 다시 복숭아를 먹는구나. 계절이 돌고 돌아 우리 앞에 복숭아를 놓아주는 게, 부적이고 작은 기적이다.

"그때, 서윤이 임신하던 해에, 그땐 어떻게 그렇게 복숭아가 달고 맛있었을까." 하는 내 말에 남편은 묻지도 않고 "응, 그랬지." 답한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남편은 단 번에 그 시절의 일과 마음을 기억해 내 공감했다. 냉장고에 떨어지지 않게 복숭아를 사다 나른 장본인이고, 내가 기억하는 인생 최고의 복숭아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같이 먹은 사람이니까.

우리는 많은 시간 별처럼 각자의 궤도를 돌지만, 서로를 비춰 주기도 한다. 함께 보낸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의 과거를 기억해 주며 깜빡, 신호를 보낸다. "응" 하는 짧은 말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로, 어떤 눈빛과 표정으로.

삶이라는 거대한 우주에서 누구와도 동일한 궤도로 돌 수 없고 완벽히 만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삶 곁에서 같은 방향으로 돌고 있는 누군가가 있어 찰나의 순간 서로를 알아채고 사라진 기억에 빛이 비춰진다. 함께라는 게 고맙고 소중하다. 

복숭아가 복숭아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복숭아를 키우느라 몇 년은 나와 남편, 둘 다 버티는 마음으로 살기도 했는데. 앞으로도 언제든 그런 시간이 찾아올 테지만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해가 거듭될수록 아이 키우기는 혼자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더 크게 실감하게 되니까.  

신비복숭아가 끝나자마자 나는 완전히 여물지 않은 딱딱이 복숭아를 사 와 가족들의 불만을 샀다. "무를 먹는 것 같다"며 다들 질색했지만 "아직 맛이 덜 들었네... 그래도 은은한 향이 있지 않아?" 하면서 혼자 꿋꿋하게 먹었다. 

연일 폭염이 기승이다. 더위에 곡식이 자라고 과일이 영글어 간다고 마음을 너그럽게 풀어본다. 뜨거운 햇볕 닮은 진한 향과 단맛이 과일 안에 고이고 있다고. 

본격 무더위에 지쳐가지만 복숭아 생각을 하면 기운이 난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복숭아, 단물 뚝뚝 흘리며 후르릅 먹을 복숭아를 생각하면 이 더위도 제 역할을 하느라 이토록 요란한가 보다 싶고.

진짜 복숭아의 계절은 이제 시작이다. 당신의 취향이 손에서 팔꿈치까지 단물을 흘리며 먹는 황도일지, 아삭하고 향긋한 딱딱이 백도일지 알 수 없지만, 냉장고에 차게 넣어둔 잘 익은 복숭아를 떠올리며 더위에 지친 마음을 달래면 좋겠다. 각자의 마음속 최애 과일을 알차게 먹으며 늘어지는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북돋길. 

다음에는 황도를 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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