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왜 '곰팡이'에게 유언을 남겼을까
[하성태 기자]
그러니까 우리는 정규 교육 과정 내 과학 시간에 곰팡이에 대해 배운다. 곰팡이는 미세한 포자를 퍼뜨려서 번식을 한다. 수가 많을수록, 좋아하는 환경일수록 포자는 빠르고 넓게 퍼진다. 그 포자는 번식을 할 만한 적절한 공간을 찾아내고야 만다.
나이가 들수록 전문가나 관련자들을 제외하고 그 곰팡이의 번식 조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포자들이 무성생식을 하는지, 유성생식을 하는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곰팡이가 무성생식만이 아니라 유성생식을 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아니한가.
얼마 전 흥미로운 연구 결과에 관한 기사를 접한 적이 있는데, 그건 단 한 종의 미생물로부터 35억년이 넘는 시간 동안 1천 만종 이상으로 진화한 생물다양성의 기원에 대한 힌트였다. 유성생식, 그러니까 섹스야말로 미생물에서 생물로, 다양한 종으로의 진화를 견인하는 원동력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곰팡이와 유성생식 이야기를 꺼낸 건 다 전대미문의 상상력을 자랑하는 이 한국영화 탓이다. 2일 개봉한 <다섯 번째 흉추>와 박세영 감독이 바로 그 괴이한 상상력의 주인공들이다.
곰팡이 생명체의 이상한데 감동적인 여정
▲ 박세영 감독의 <다섯 번째 흉추> 스틸 이미지. |
ⓒ 인디스토리 |
"지금 떠나면 넌 죽어야 돼."
돌고래의 한 종류인 상괭이가 한강에 출몰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상괭이를 연구한다는 결(문혜인)이 연인인 윤(함세영)에게 말한다. 어떤 형태로든 연인과 이런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는 이들은 짐작조차 힘들지 모를 일이다.
결이 배신을 때린 윤에게 품고 있는 집착과 애증, 이를 아우르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그 복잡 미묘함을. 곰팡이가 그 결과 윤이 살았던 방, 그것도 침대 매트리스에서 탄생한다. 만약 그 곰팡이가 감정은 물론이요, 육신을 갖게 됐다면? <다섯 번째 흉추>의 괴이하면서 독창적인 상상력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결이 윤에게 한강 잠수 경험을 말해준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400개 넘는 뼈를 발견했다고 한다. 예상과 다르게 이상한 것들만 발견했다는데, 두개골은 다 날아가고 없었지만 척추뼈, 그러니까 경추, 유추, 흉추에는 살갗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흉추는 척추 뼈 중에서도 특히 심장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다.
더러운 곳에 피어나는 꽃과 같은 곰팡이 생명체는 결이 떠나고 없는 '쓰레기 방'에서 태어난다. 태어나기도 전인 곰팡이 생명체가 결의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됐든 남녀가 사랑을 나눴을 침대 매트리스에서 탄생한 것이다.
▲ 박세영 감독의 <다섯 번째 흉추> 스틸 이미지. |
ⓒ 인디스토리 |
<다섯 번째 흉추>는 이 남녀의 사정(事情)이 탄생시킨 생명체의 여정(旅行)인 동시에 여정(旅情)의 기록이다. 매트리스 속에서 기생하는 이 생명체는 누군가에게 팔리거나 주워져서 이동할 때마다 다른 남녀의, 다른 이의 사정을 탐독하고 탐닉하게 된다. 사물의 여정에 따라 등장인물이 교체된다. 흔치는 않지만 때때로 마주하게 되는 서사다.
"평생 볼 일 없는 친구"사이로 남았다고 했다가 '이별 섹스'인지 '재결합 섹스'인지 모를 하룻밤을 보내는 남녀의 사정은 모텔에서, 죽어가는 이에게 편지를 전달 받은 사정은 병상에서 청취하는 식이다. 우리나라의 매트리스 재활용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매트리스에 기생하며 이들의 흉추를 강탈한 곰팡이 생명체의 생명력을 무척이나 끈질기다.
이 여정은 급기야 서울 강북구에서 탄생해, 노원구와 도봉구, 서울 북부 어딘가를 거쳐 북쪽 땅에 가까운 연천에까지 가닿는다. 그 여정 속에서 남녀들의 사정을, 여정을, 그리고 흉추를 탐독하고 강탈한 곰팡이 생명체는 "죽어"라던 결의 감정에 더 이끌렸을까, 아니면 헤어질 결심으로 만났지만 끝내 남자친구를 품어 안은 율(온정연)의 복잡한 심경에 공감했을까.
그도 아니면 그들의 모든 사정을 흡수한 채로 또 다른 탈주를 꿈꿨을까. 자꾸만 존재하지 않는 조어인 '여정기'(旅情記)를 쓰고 싶은 욕구가 피어오르는 건 그래서다. 곰팡이 생명체는 매트리스의 여정(旅行) 속에서 만나는 이들의 흉추만 획득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여정(旅情)을 습득하고 흡수했을 터다.
영화 자체가 아예 2002년 6월 1일 강북구가 생일인 이 생명체의 여정을 자막으로 친절히 기록해 놓고 있다. 이 여정이 마침내 서울을 벗어나 연천 강물 앞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초반부 결이 윤에게 했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범상치 않은 마지막 당부
▲ 박세영 감독의 <다섯 번째 흉추> 스틸 이미지. |
ⓒ 인디스토리 |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다섯 번째 흉추>는 서사의 결보다는 영화적인 동시에 영상적인 형태로 말을 걸고 음악적인 리듬으로 그 말의 뜻을 완성시켜 나가는 작품이다.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을 예산의 한계를 뛰어 넘는 영상 아이디어들이 살아 숨 쉬는 동시에 감각적인 음악이 그 아이디어들에 또 다른 숨을 불어 넣는다. 결이 떠나고 없는 방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곰팡이의 탄생을 기록하는 감각적이고 매혹적인 영상과 음악, 미술과 색감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고 서사적 긴장을 놓치지도 않는다. 생존을 위해 인간의 흉추를 강탈한다는 듣도 보도 못한 설정 자체도 물론이거니와 상상력 넘치는 그 설정을 무척이나 생경한 듯 영화적인 언어로 표현해 낸다. 과감한 생략과 극단적인 강조 기법, 생경하거나 낯설게 만드는 음악 등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그 강탈의 장면들을 보고 있다 보면 왠지 모를 기묘한 감동까지 일어난다.
무수한 국내외 장르영화제에 초청받은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박세영 감독은 7080년대 특히 유행했던 신체 강탈 장르의 설정들을 대한민국 서울에 이식해 온 것도 모자라 이를 전혀 새롭고 감각적인 형태로 발전시킨다. 그와 동시에 듣도 보도 못한 곰팡이 생명체란 독창적인 창조물의 사정과 여정을 버무리는 연출력을 자랑한다. 이 모두 흔치 않는 시도라 저절로 박세영 감독의 단편 전작들이, 차기작이 궁금해질 정도다.
다시 곰팡이의 여정으로 돌아가 볼까. 매트리스에서 탄생한 곰팡이는 범인들이 볼 땐 그저 추상과도 존재다. 미물이다. 그 미물이 인간의 흉추(심장)를 먹고 감정을 품어 안고는 생과 사, 인간의 사정과 희로애락을 간직한 비밀의 강으로 흘러 흘러 들어간다. 기묘한 감동과 아름다움의 공존이라고 할까.
<다섯 번째 흉추>는 죽어가는 이의 병실 달력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근원적인 물음, 그러니까 '모든 생명체의 숨겨진 생명력은 어디서 움트나'에 관한 영화다. "징그럽고, 더럽고, 지저분한 주인공 뒤에 원인 모를 슬픔과 파악할 수 없는 감정들을 파악해 보려고 만든 영화"라는 박세연 감독의 의도가 전 세계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에게 가 닿았던 것 만은 확실해 보인다.
차기작이 궁금하던 차에 박세연 감독이 루이비통과 BTS가 콜라보 한 패션 필름(LVMenFW21)을 <소공녀> 전고운 감독과 함께 공동 연출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접하고 영상을 직접 찾아봤다. 영상을 보니, 박 감독이 데뷔작 <다섯 번째 흉추>로 확인시킨 자기만의 감각을 어떤 소재로 풀어낼지 더 궁금해졌다.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겠다. 영화 중반 죽어가던 엄마 환자는 곰팡이 생명체에게 편지를 맡긴다. 아마도 생명체가 읽었을 그 엄마의 편지 속 유언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이자 내레이션인데, 이런 당부를 자막을 통해 알려주는 아주 먼 미래, 연천의 강물이란 독창적인 시공간적 연출을 곁들여 배치한 박세영 감독의 차기작도 범상치는 않을 것 같다.
"안녕, 지우. 이 편지가 너에게 잘 도착했길 바래. 모든 작별이 슬프다는 법은 없지만 조금은 울어줬으면 좋겠어. 이제야 너를 놓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아. 지우야, 비타민 챙겨 먹어라. 오메가는 부엌 서럽장 안에 넣어뒀으니 아침에 두 스푼 물에 타서... 밤에 커피 마시지 말고. 불면증이 찾아 오면 가... 가... 가만히.. 누워서 한 번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돌이켜 봐라. 내일이 기다려질 것이다. 가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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