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신 폭망인데 어쩌죠", 학생 질문에 고3담임인 내가 해준 말
[신정섭 기자]
▲ '대입 수시 기회균형 특별진학 준비는 어떻게?' 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진로진학정보센터에 설치된 '2024 대입 수시모집 대비 기회균형 특별진학상담센터'를 찾은 수험생 가족이 상담을 받고 있다. |
ⓒ 연합뉴스 |
"선생님, 저 어디 갈 수 있을까요?"
"내신 폭망인데 정시 도전해야 할까요?"
"5점대 후반인데 갈 수 있는 간호학과 없나요?"
아이들은 끝도 없이 질문을 쏟아낸다. 고3 담임 경력이 한두 해가 아니지만, 수시모집 원서 작성을 한달 여 앞둔 8월 초만 되면 골치가 아프기 시작한다. 입시상담을 할 때마다 '내 말 한 마디가 우리반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고, 그로 인한 중압감은 체온을 넘나드는 폭염도 감히 녹여내지 못한다.
87학번인 나는 학력고사 세대다. 딱 한 군데만 지원할 수 있었던 까닭에 혹시라도 떨어지면 곧바로 재수를 해야 했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러니 당시 담임 선생님의 '조언'은 사실상 '명령'에 가까웠다. 지금은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요즘 아이들은 정보에 매우 밝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도 많고, 돈을 주고 입시 컨설턴트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 <수박 먹고 대학 간다> 책자의 목록 중 일부. 무려 1390페이지에 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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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정보에 밝고 입시전략을 잘 짠다고 해도, 담임교사 의존도가 줄어들었을 뿐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수시모집에서는 (사관학교나 KAIST 등 특별법에 의해 설치된 특수대학, 전문대 등은 예외를 인정받지만) 학생 한 명이 최대 6곳에 지원할 수 있다. 선택지가 많으니 수월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시에 합격할 경우 등록 여부에 관계 없이 정시모집에 지원할 수 없기 때문에-시쳇말로 '수시 납치'라 부른다-,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고3 담임을 맡았거나 대입 진학지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박 먹고 대학 간다>는 책을 모를 리 없다(아래 사진은 책 목록의 일부). '수박'은 '수시 대박'의 약자다. 저자인 이대부속고등학교 진로진학부장 박권우 선생님은 셀럽이 된 지 오래다. 올해도 무려 139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수록했다. 학교에서 책자를 구입해 교탁에 올려놓고 아이들이 활용하도록 하는데,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대학은 엄청 많은데 제가 갈 데는 없네요..."이다.
교과전형은 내신으로 줄 세우기
교사들은 위 책자를 참조하되, 실제 입시 상담에서는 온라인 대입상담 프로그램을 즐겨 사용한다. 몇몇 유용한 플랫폼이 있는데, 나는 최근 몇 년 동안의 합격/불합격 사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어디가'(https://high.adiga.kr/index.do)를 주로 쓴다.
A학생이 충남대 간호학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해서 살펴보았더니, 내신성적이 충원합격(추가합격의 다른 말: 보통 '추합'이라고 줄여 표현) 컷오프 바깥에 있다(아래 캡처화면 참조).
"아무래도 여긴 어렵겠다. 다른 대학을 찾아봐야겠다."
안타깝게도, 입시상담할 때 가장 많이 내뱉어야 하는 말이다. 학종(학생부 종합전형)은 조금 다르지만, 교과전형은 오로지 내신성적으로만 줄을 세운다. 면접 결과를 20~30% 반영하는 전형도 있긴 하지만, 내신성적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다.
아이들은 의외로 쿨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내 실력이 부족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가 내면화된 탓이다. 결국 대입 상담은 학과를 고집할 경우 대학을 낮추고, 대학 간판을 중시하면 학과를 낮추는 불편한 일의 연속이다.
학종은 내신과 비교과 실적으로 줄 세우기
교사 입장에서는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다. 아이의 적성과 소질, 잠재력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점수만으로 줄을 세워 평가하는 시스템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되묻게 된다. "그럼 학종을 선택하면 되지 않나?"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학종이라고 해서 줄 세우기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내신성적에 더해 학생부에 기록된 (흔히 '스펙'이라 부르는) 비교과 실적을 점수화해 다시 서열을 매긴다.
내신성적이 안 좋은 학생들은 학종을 노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조국 자녀 입시부정 의혹'을 계기로 학생부에 기재되는 비교과 활동이 대폭 축소되었다. 수상실적, 자율동아리 활동, 독서활동 등이 빠졌고, 대부분의 대학이 자기소개서나 교사 추천서마저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대학 입장에서는 '교과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교과세특)'이나 진로활동 기록 등에 방점을 찍게 되는데 당연히 과학고, 외고, 자사고 등 특목고에 유리하다. 일반고 학생들의 경우, 학종에서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렵고 결국 내신성적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 고교용 대입상담 프로그램 '어디가' 합격/불합격 사례 화면 갈무리 최근 3년간 특정 대학 및 학과의 합격/불합격 사례를 한눈에 보여주는 온라인 대입상담 프로그램입니다. 사진은 A학생의 충남대 간호학과 합격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
ⓒ 어디가 화면캡처 |
그렇다면 수능성적만으로 선발하는 정시전형은?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정시가 가장 공정하다고 주장해왔다. 이는 부모의 학력이나 경제력과는 상관없이 본인의 실력으로 수능만 잘 보면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수능 성적이 사교육의 양과 질을 좌우하는 학부모 변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 3월 16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장학재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5개년 SKY 신입생의 소득분위별 장학금신청 현황'에 따르면, 2021년 서울대 장학금 신청자 2037명 가운데 소득분위 9~10구간 학생은 1130명으로 55.5%에 달했다. 반면 저소득층인 소득분위 1~2구간 학생은 138명(6.7%)에 불과했다. 2017년에 비해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학력이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포함한 서울 소재 주요 대학은 정시전형으로 약 40%를 선발한다. 반면 지방소멸 위기를 겪고 있는 지방 대학들은 정시모집 인원이 매우 적다. 미달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수시전형으로 학생들을 선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지방의 일반고 학생의 입장에서 정시는 사실상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게 행복
입시상담 끄트머리에 내가 아이들에게 잊지 않고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런 말들이 제자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내신성적이나 수능점수로만 줄 세워 신입생을 선발하는 참담한 현실에서 빼놓고 싶지 않은 말임에는 틀림없다.
"좋은 대학 간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점수에 맞춰 진로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지만,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 잊지 마렴."
"여든 살 산다고 치고, 네 인생시계는 이제 겨우 15분을 가리키고 있어. 아직도 4분의 3이 남아 있으니 멀리 내다보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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