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훈은 건실하다, ‘비공식작전’ 김판수 레시피 [홍종선의 캐릭터탐구㊹]
캐릭터는 배우의 인성에 빚진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인은 뛰어난 연기력으로 제조할 수 있지만, 마음속에서 따뜻함이 배어 나오는 캐릭터는 연기만으로 관객이 속지 않는다. 더구나 언뜻 보기엔 한없이 가볍고 사기성이 있어도 속에는 ‘뜨뜻한’ 인간애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다층적 인물의 경우엔 더욱 배우의 바탕에 선함과 반듯함이 자리하고 있어야 관객을 설득할 수 있다.
영화 ‘비공식작전’(감독 김성훈, 제작 와인드업필름·와이낫필름, 제공·배급 ㈜소박스)의 주인공 김판수는 ‘겉바속촉’(겉은 바삭, 속은 촉촉)의 인물이다.
고국에서 머나먼 타국 레바논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김판수는 돈이 돼야 움직이고, 웬만해선 상대보다 아래에 서고 싶지 않아 나이를 속이는 인물로 우리와 첫 대면을 한다. 녹록지 않고 뻣뻣하고 성깔도 있어 뵌다. 동시에 그를 통하면 안 되는 일 없어 보이게 만사 유들유들 능수능란하다.
왜 아니랴, 지금도 한인교포가 드문, 영화의 배경인 1986~7년에는 유일한 동양인이었을 그곳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그렇다고 괜한 미움 사지도 않으면서 혈혈단신 살아남아야 했던 김판수다. 타고난 키에 근육을 붙여 몸집을 키워야 했던 건, 호객행위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패션으로나마 튀어야 했던 건 모두 처절한 생존전략이다.
때로 뻔뻔하게 뻣뻣하고 때로 언제 그랬냐는 듯 넙죽 고개 숙이는 걸 두고 ‘속촉’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김판수의 내면엔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택시를 내놓다 못해 하나뿐인 목숨도 거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른 척 도망치지 못하고 함께 엮이는’ 의리가 있고. 그렇게 제 모든 걸 내주고도, 대가를 말해도 되는 순간에 자신의 바람이 상대를 곤란하게 할까 봐 저어하는 마음에 요구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순둥이의 선함이 있다.
영화를 보며 생각한다. 오재석 서기관(임형국 분)의 기억 그대로, ‘건실한 청년’ 김판수를 배우 주지훈 아닌 누가 가능했을까. 외국에서도 꿇리지 않는 외모에 따뜻한 내면, 정우성이 떠오른다. 화려한 패션 소화력, 뺀질거림도 능청스러운 연기력까지 생각하니 주지훈이 최상의 캐스팅이다.
배우 내면에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단박에 알아차리긴 어렵다. 그동안의 출연작에서 발견했던 눈빛과 표정들, 무대인사나 간담회 등 작품 관련 행사에서 보았던 모습이나 들었거나 읽었던 발언들, 예능에서 목격한 인성과 개성 등의 총합이 배우에 대한 ‘지배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횟수가 거듭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되기도, 강화되기도, 고착된다.
새해 벽두 tvN을 통해 공개된 예능 ‘두 발로 티켓팅’은 대중이 주지훈을 재발견하는 계기였다. 샤이니 민호와 함께 바이크를 타면서, (알고 보니 기어를 잘못 조작해 빡빡하게 탄 것이었지만) 낙오 위기에 놓인 후배를 조용히 격려했다. 후배가 자신이 지연시키는 시간으로 인해 자책할까 봐 요란스럽지 않게 챙겼다. 엄마처럼 척척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드는 솜씨가 주는 놀라움보다 엄마처럼 후배들을 자상하게 챙기는 마음씨가 주는 감탄이 컸다. 하정우라는 선배와 후배 이민호·여진구의 사이에서 중간 허리 역할을 제대로 했다. 자신의 위치가 어디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확실하게 실천하는 센스가 돋보였다.
영화 ‘비공식작전’의 김성훈 감독이 전하는 ‘사람 주지훈’ 얘기를 들어도 김판수가 어떻게 주지훈의 몸과 마음을 통과해 지금의 모습으로 탄생할 수 있었는지 보인다. 김성훈 감독은 하정우, 주지훈 두 배우의 공통점에서 얘기를 시작해 주지훈 개별의 특성으로 이야기를 심화해 갔다.
“둘 다 엄청 유연해요. 유연함은 자기 확신이 있을 때, ‘내가 이런 색이야!’ 돋보여야 할 때는 날을 세워야 하죠. 두 배우는 ‘아, 여기서는 작품이 굴러가기 위해서 나를 깎아 줄게’라는 태도가 형성돼 있어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발휘되는 유연함, 준비를 잘해 왔다는 거죠. 작품에 대한 준비, 배우로서 갈고닦은 준비가 담보돼 있기에 현장에서의 유연함이 대단한 두 분이에요.”
“주지훈 배우는 유연성 기본에 생존본능을 지니고 있어요. 어렸을 때 작은 집에 많은 식구, 9명이 함께 살았다 해요. 살기 위해서 사람의 눈치를 봤다, 지훈 씨는 저기 한쪽에 떨어진 사람의 기분이 나쁜 걸 알아요. 현장에서 지훈 씨는 휴대전화로 단순한 게임, 소리 안 나는 걸 해요, 긴장을 풀고 집중에 시동을 거는 것 같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게임 하면서도) 저쪽 구석에서 연출부가 얘기하는 것도 알아요. 레이더가 주변에 꽂혀 있어요. 연출부들 고민 듣고 ‘어, 그거는 이렇게 하죠’ 말해요, 놀랍죠. 생존본능에 더해 주변 사람의 상황을 다 인지해서 갖고 있으려 한다는 거죠. 이걸 연기에 적용하면, 상대 캐릭터를 이해하고 시나리오를 이해해서 영화를 조화롭게 살려내는 힘이 있어요. 주지훈 배우는 본인이 위치한 이 공간에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고모 삼촌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탁월한 본능에 작품 활동 하면서 더해진 후천적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인터뷰에서 예상치 못한 짓궂은 질문을 받았을 때 나온 즉답에서도 주지훈의 선함을 보았다. 인성을 보려는 질문이 아니었는데,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질문은 주지훈이 하정우가 연기한 이민준 외무부 사무관을, 하정우가 주지훈의 김판수를 연기했을 때의 장점과 단점이었다.
“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각자 타고난 특성이 다르고 연기가 달라서 네, 다르겠네요. 제가 민준을 하면 고산지대 마을 무장단체 총질 때 도망가려는 판수 보면서 정우 형이 지었던 그 긴박감과 긴장감, 위트를 줄 수 있는 호흡과 표정들이 힘들었겠어요. 차량 펑 터지는 테러당하고 나서 처연함을 표현하면서도 위트 줄 수 있는 표정도 힘들겠네요. 그건 타고난 표정과 쌓아온 표현법이 달라서, 하정우여야 할 수 있는 거라서, 노력한다고 되는 부분이 아닌 것 같아요. 하정우가 판수를 한다, 제가 한 것보다 사랑스럽지 않았을까. 조금 더 남녀노소에게 현실적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바꿔도 재미있었겠죠, 특히 ‘제가 사실은 동생이에요’ 하는 장면을 형이 하면, 관객분들의 머릿속에서 현실의 나이와 겹치면서, 하하, 웃겼겠다, 재미있겠네요. 몇몇 장면 꼴라보로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영화 ‘신과 함께’의 강림과 혜원맥도, 정우 형이 혜원맥 해도 잘 어울렸을 것 같아요.”
여러 명의 기자가 함께 인터뷰 중이었는데 부지불식간에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아이고, 너무 착해서 형이 하는 건 전부 더 좋고, 본인이 하는 건 나쁘다고 하네”. 혼잣말을 하려던 것도 아니고, 마음속 생각이었는데 툭 튀어나왔다. 맞다, 주지훈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연애가 끝나고 나면 많은 사람이 나의 억울함과 상대의 잘못을 얘기한다. 양쪽이 똑같다. 주지훈은 “남자와 여자가 사귀다 헤어졌다면, 어찌 됐든 그건 남자 잘못이 큽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기변명 대신 자기책임을 강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배우 주지훈으로서도 마찬가지다. ‘비공식작전’은 유달리 두 주연배우의 합이 중요하고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다. 영화 초반, 너무 위험하니 이제 내 차에서 내리라는 판수와 너무나 막막해서 판수 외에는 대안이 없는 민준의 승강이 장면이 있다. 촬영 에피소드에 대해 말하는 주지훈의 얘기를 들으면, 그가 어떤 자세로 연기에 임하는지 그 결과 판수의 행동이 그 장면에서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알 수 있다.
“저는 갈등을 푸는 게 아니라 눈치를 봐요. 하지만 너무너무 신뢰하니까 괜찮아요. (촬영) 테이크 전에 엄청 고민하죠, 나는 저것보다 이게 나을 것 같은데 싶어 툭 던져 봤는데, 확고해요, 상대가. 그럼 제가 생각해요, ‘아, 빨리 받아들이고 일단 해 보자’. 우선 찍고 나서 제가 (본인이 생각했던 버전으로) ‘한 번 더 찍을까요?’ 말하는 쪽이에요. 정우 형이나 감독님이나 말할 수 있는 편안함이 있고요. 그런 과정에서, 제가 생각지 못했던 해석들이 많이 나오고, ‘우아!’했던 경험이 많아요.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거죠, 쉬운 방법이지만 누구나 생각하는 건 아니잖아요, 결과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고요.”
“(승강이 장면에서) 사실은 민준이 대화 마지막에 들어가면, 판수가 ‘(차 밖으로) 나와요’ 말하는 거였어요. 근데 형이 먼저 들어가 차 안에서 대사하는 거예요. 순간 집중 깨지긴 했지만, ‘해 보자!’ 싶더라고요. 그래서 ‘아, 빨리 나와요’라는 대사를 칠 수 있었어요. 대본대로가 아니라 찍다가 나온 거예요. 그 긴 신을, 편집으로는 짧지만 촬영은 긴 장면인데, 근데 마(중간에 끊기는 것)가 없어요. 끝나니 저 모니터에서 감독님이 ‘으하하하하’ 웃어요, 어떻게 됐다! 정우 형도 안으로 들어갈 때 아차 했을 텐데, 서로 다 잘 넘어간 거예요, 신뢰를 바탕으로.”
“만일 제가 못 받아쳤으면, 되레 내가 자책했을 거예요. 나였으면 먼저 들어가면 버벅대며 ‘죄송해요, 먼저 들어 왔어요’ 했을 텐데. 그런데 저렇게 스윽 갈 수 있구나, 그랬더니 좋은 게 나오네! (차 안으로 먼저 들어간 것도) 해석이라면 해석이죠. 촬영을 하는 태도에 대한 해석, 앉혀놓고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저보다 많은 일을 해온 짬에서 오는 여유를 보고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형들과 일하는 게 좋아요.”
하나의 촬영 장면을 이토록 생생하게 전할 수 있다니! 모로코로 가서 그 현장에 함께 서 있었던 것만 같다, 아니 그 차 안에 앉아서 판수와 민준의 옥신각신을 본 것만 같다. 어긋남을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합일로 끌어낸 경험에서 이토록 큰 쾌감과 배움을 건져 올릴 수 있다니! 긍정과 건강한 사고, 유연함과 조화로움으로 가득한 주지훈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잠시 들여다본 것만 같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캐릭터는 배우의 인성에 기대어 완성된다. 상황 판단에 빨라 ‘사람이 셋, 자리는 둘’인 상황에서 내가 먼저 물러서는 김판수의 그 마음 씀씀이는 사람 주지훈에게서 나오고, 그래서 관객은 주지훈의 인성을 알든 그러지 못하든 판수의 그 판단과 반응에서 진정성을 느낀다. 화면 안으로 들어가 위축된 어깨를 안아주고픈, 굽은 등이 펴지게 두드려 주고픈 마음이 든다. 명장면이 탄생하고, 캐릭터가 살아서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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