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내리는 커피] 바나나 먹을 줄 몰라 외교를 못한다?

2023. 8. 5.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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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으로 향하던 1950년 봄은 애국의 계절이었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북진통일을 외쳤고, 언론에서는 근검절약과 국산품 애용을 주장했다.

정부수립 초기 60원에서 출발한 다방 커피 한 잔 값은 1949년 200원을 넘기더니 1950년 봄 400원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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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학과 교수


6·25전쟁으로 향하던 1950년 봄은 애국의 계절이었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북진통일을 외쳤고, 언론에서는 근검절약과 국산품 애용을 주장했다. 저성장에 고물가, 전쟁 타령에 백성들은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당시 저성장 고물가의 배경은 수입이 수출을 초과하는 ‘입초’였다. 어려운 나라 경제를 상징하는 단어였고, 국산품 애용의 이유로 언론에 자주 등장한 단어였다. 요즘 말로는 무역적자 시대였다.

정부수립 초기 60원에서 출발한 다방 커피 한 잔 값은 1949년 200원을 넘기더니 1950년 봄 400원에 이르렀다. 2년 사이에 6배 이상 오른 것이다. 그야말로 살인적 물가였다. 그런데도 서울시내 100여 개의 다방은 늘 손님들로 북적였다. 엄청난 무역적자 시대인데도 명품 소비는 줄지 않는 요즘과 다르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애국하는 모습에서 정부와 시민은 달랐다. 정부는 양력인 신정을 강요했지만, 시민들은 우리식 명절 설날을 고집했다. 설날을 전후해 시내의 많은 상점은 철시했고,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강제로 문을 열도록 했다. 정부는 커피 가격을 통제하려 했지만, 다방에서는 새로운 차를 개발해 대응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아까데미차’였다. 값비싼 커피 대신 국산 생강으로 만든 차였다. 생강차라는 촌스러운 이름 대신 아까데미차라는 고급스런 이름을 붙였다. 커피에 대응하는 아까데미차였다. 애국하는 마음에서 아까데미차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비싼 커피값이 부담스러워 아까데미차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가장 흥미로웠던 일화 중 하나는 바나나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대중의 식생활에 그리 중요하지 않은 바나나가 흘러들어와 명동 모모 다방에서 고가로 판매하는 것이 문제가 됐다. 출초의 시대라면 영양가 있는 바나나를 수입해 대중의 구미를 조장시키는 것이 좋겠지만 절약이 강조되는 시대에 과연 바나나 판매는 허용해야 할 것인가?

동아일보 1950년 3월 17일자에는 이 문제에 대한 지상 토론이 벌어졌다. 재무부 세관국장과 공보처 공보국장의 대립적 의견이 실렸다. 세관국장은 “장차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우리나라 외교관이 바나나가 무엇인지 몰라서 껍질까지 먹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바나나 맛은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고, 그러기 때문에 정식 수입은 못하더라도 휴대품으로 들여오든지 세관의 눈을 속여 들여오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보국장은 “바나나를 먹을 줄 몰라 외교를 못한다는 것은 되지 않는 말이다. 국민운동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해야 할 일이다. 바나나는 지금 먹을 때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바나나를 둘러싼 주장 자체도 흥미롭지만 정부의 두 부처 국장 사이에 이런 공개 토론이 가능하였다는 점, 언론이 토론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이 놀랍다. 소신이 없는 공직자들, 정치의 시녀가 된 언론이 들여다봐야 할 역사라는 거울이다.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학과 교수 leegs@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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