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선생님께 경례
인생을 살아오며 수많은 님을 만났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을 시작으로 성경을 읽을 때는 하나님을 뵙고 불경을 읽을 때는 부처님을 뵈었으며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할 적에는 친절한 손님과 무례한 손님을 마주했다. 어디 이뿐이랴. 식당에서는 이모님, 버스에서는 기사님, 직장에서는 선배님과 후배님까지. 곰곰이 따져 보니 님이 아닌 이가 없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는 공자의 말처럼 그동안 만나온 님들은 나에게 다양한 깨달음을 주었다. 차가운 커피를 시켜놓고 이 시리다고 불평하는 손님처럼은 되지 않아야겠다거나 부모님을 닮아 잔소리꾼이 될 것 같으니 아이는 낳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그렇다.
잔소리꾼 아빠의 레퍼토리는 대략 이와 같다.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한다, 서른이 넘으면 주름이 자글자글해져서 선도 재취 자리밖에 안 들어온다, 나라에서 면허를 주는 업을 가져야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 개중에 가장 즐겨했던 잔소리는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이 최고라는 이야기였다. 공무원이니까 ‘철밥통’이지, 출퇴근 시간 일정해서 애 키우기 좋지, 방학이 있어 장기 휴가를 보낼 수도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긴긴 잔소리의 대미는 늘 이 문장으로 장식되었다. “대통령도 제 자식 맡긴 선생님한테는 고개를 숙이는 거여!”
아빠의 잔소리에 동조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만난 님 중 최고의 님이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건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담임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매일 아침 교문 앞에서 교통정리를 하셨다. 삑삑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양손을 절도 있으면서도 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멀리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교통정리 댄스를 추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한번은 우리 반 아이가 선생님께 물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무엇 하려 하시느냐 말이다. 당신보다 족히 스무 살은 어린 우리에게 존댓말을 쓰시던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아껴서 뭐 합니까. 우리 학생들 안전하게 등교해야죠.”
아침 햇볕에 그을린 선생님의 까무잡잡한 얼굴 뒤로 또 다른 선생님들의 모습이 스친다. 미술 선생님은 스케치북을 가지고 오지 않은 나를 나무라지 않으셨다. 대신 낙엽이나 손바닥, 심지어 팔레트에 그림을 그려도 괜찮다며 고정관념을 깨 주셨다. 음악 선생님은 연이은 수업에 지친 우리를 나무 그늘 아래로 데리고 가셨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코러스 삼아 노래를 부르게 해 주신 선생님 덕에 낭만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었다. 세계사 선생님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도, 시험을 엉망으로 봐도,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졸아도, 온갖 이유를 붙여 가며 “훌륭하군요!” 하는 칭찬으로 자신감이라는 씨앗을 심어 주셨다.
천둥벌거숭이 같았던 나는 선생님들의 사랑을 자양분 삼아 그럭저럭 사람 구실을 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부모님의 입김에서 벗어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는 나날을 보낸 결과, 아빠의 잔소리 중 맞는 것도 있지만 구시대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도 시나브로 알게 되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더울 때 시원한 데서 일하고 추울 때 따뜻한 데서 일하니 아빠의 말은 철 지난 이야기다. 내일모레 마흔을 앞둔지라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기는 하지만 보톡스가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으니 이 역시 옛이야기다. 그런데 대통령도 제 자식 맡긴 선생님께는 고개를 숙인다는 말까지 과거의 이야기가 될 줄 나는 미처 몰랐다.
교실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다.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선생님의 얼굴을 애써 떠올려 본다. 포동포동했던 내 얼굴에 주름이 생겼듯 선생님의 얼굴에도 꼭 그만큼의 주름이 더해졌을 터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생겨난 것도 있겠지만 걱정과 한숨으로 얼룩진 주름도 분명 존재하리라. 요즘은 수업을 시작할 때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군대식 구령이라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제의 잔재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멀리에 계신 선생님들을 향해 구시대적 인사를 건네고 싶다. 차렷, 열중쉬어, 차렷, 선생님께 경례. 선생님, 안녕하세요. 정말로 안녕하셨으면 해요.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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