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명의 목숨 앗아간 분노 범죄, 이들은 왜 살인했나
[이준목 기자]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 SBS |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사고이자 대량살상사건으로 기억되는 비극이다.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지만 범인인 조승희가 한국 국적자였기에 당시 한국 사회도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범인 포함 33명의 사상자와 29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이 희대의 참극은 대체 왜 벌어진 것일까.
3일 방송된 SBS 예능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외톨이가 보낸 소포 -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편을 통해 평범한 캠퍼스를 피로 물들인 그날의 진실과 범인 조승희의 행적을 조명했다.
2007년 4월 16일 월요일, 미국 버지니아 블랙스버그에 위치한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교. 전날 학교 축제를 마치고 평화롭던 봄날의 캠퍼스는, 돌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휩싸인다. "절대 건물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지고 경찰차들이 엄청난 속도로 학교로 출동한다.
문 걸어 잠그고 시작된 비극
비극은 그날 아침 7시부터 시작됐다. 버지니아대 여자 기숙사에서 총격이 벌어지고 학생 에밀리 양과 기숙사 사감이 총을 맞고 사망한다. 학교 내에서 두 사람이 살해당했지만 학교 전체에 소식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사건이 벌어진 기숙사가 캠퍼스 외곽에 위치한 데다, 경찰이 사건 초기에 용의자를 외부인으로 추정한 탓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더 큰 참극을 불러오는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범인은 영문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국인 유학생 조승희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날의 범행을 위해 자신만의 끔찍한 살인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다수 대학생들은 그날도 평화롭게 등교하고 있었다. 당일 강의가 가장 많았던 곳은 '노리스홀'이라는 3층짜리 건물이었다. 기숙사에서의 1차 범행 이후 약 2시간이 흐른 뒤, 조승희는 검은 배낭을 메고 노리스홀로 향했다. 조승희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준비한 쇠사슬과 자물쇠를 꺼내 모든 출입문과 비상구를 봉쇄했다. 그리고 잠긴 문에 "문을 열면 폭탄이 터질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붙였다.
당시 노리스홀에는 총 5개의 강의실에서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조승희는 강의실을 기웃거렸고, 학생들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처음엔 강의실을 잘못 찾겠거니 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후 조승희는 가장 먼저 206호 강의실에서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206호에 있던 총기사건의 유일한 한국인 피해자이자 생존자는 "처음에는 총격인지 구분이 안 됐고, 소리에 압도됐다. 첫 번째 강의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피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승희는 맞은 편인 207호 강의실로 들어와 총을 난사했다. 조승희가 수십명의 학생들과 교수를 학살할 동안 한 강의실에 머문 시간은 채 1분도 되지 않았다.
205호 강의실은 시끄러운 총성과 총을 들고 있던 조승희를 목격하고 재빨리 문을 닫았다. 학생들은 책상, 캐비닛, 의자 등을 끌고 와 문을 막고 기대며 필사의 바리게이트를 쳤다. 조승희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문에다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놀란 학생들은 몸을 낮추면서도 젖 먹던 힘을 다해 문을 사수했다. 조승희는 결국 205호 강의실을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를 이동했다.
하지만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첫 총격이 시작된 지 약 2분 여가 지난 오전 9시 41분, 조승희는 이번엔 211호 강의실을 노렸다. 재학생 콜린 고다드는 다급하게 911에 신고했는데 총기난사 발생 이후 첫 신고였다. 하지만 조승희의 총격에 콜린도 총을 맞고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콜린은 기절했지만 그의 휴대폰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현장의 상황이 휴대폰을 통해 911에 그대로 중계되고 있었다.
한 여학생이 용기를 내어 죽은 척 누워있다가 필사적으로 휴대폰 쪽으로 기어가, 본인의 머리카락으로 휴대폰을 덮었다. 잠시 후 조승희가 강의실을 빠져나가자 여학생은 휴대폰을 들고 911에 '아시아계 남성이 총을 난사하고 있다'고 신고했다.
조승희는 이어 204호로 이동했다. 당시 그곳에서 강의 중이었던 76세의 리비우 리브레스쿠 교수는 루마니아 출신의 존경받던 공학자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서도 살아남았던 인물이었다. 리브레스쿠 교수는 총소리를 알아차리자마자 재빨리 달려가 창문을 깨뜨리고 학생들을 탈출시켰다. 그는 학생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며 온몸으로 문을 막아섰다. 무려 다섯 발의 총을 맞은 리브레스쿠 교수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지만, 노교수의 숭고한 희생으로 여러 학생들이 모두 목숨을 건졌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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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받고 출동한 무장 경찰이 노리스 홀에 도착했지만, 입구가 봉쇄된 상황이라 진입에 시간이 걸렸다. 범인을 수색하던 경찰들에게 누군가 "저 사람이 범인이다"라고 가리켰다. 학생이 가리킨 곳에는 조끼를 입은 아시아계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주변엔 빈 탄창과 권총이 놓여있었다. 범인 조승희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조승희가 범행을 저지른 시간은 단 9분에 불과했고, 그동안 조승희가 쏜 총탄은 무려 174발이었다. 사망자는 총 32명, 부상자는 29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라 불리며 미국과 온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 집요하고 잔인한 범행을 저지른 살인마가 한국인 유학생으로 밝혀지면서 우리나라에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조승희는 대체 누구이며 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일까. 경찰은 학교에서 조승희의 행적을 수사하다가 예상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된다. 놀랍게도 조승희는 3년이 넘는 학교 생활에도 불구하고 친한 친구가 없었고, 피해자들도 대부분 조승희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조승희는 미국 영주권자였고, 국적은 한국이었다. 혹시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나 따돌림 때문에 상처를 받았던 것일까. 하지만 주변인들은 소통을 거부한 건 조승희 쪽이었고, 심지어 방을 함께 쓴 룸메이트와도 대화 없이 지냈다고 한다.
조승희는 8살이던 1992년,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던 조승희는 중학생이 되면서 언젠가부터 말을 하지 않았고 병원에서 '선택적 함구증'(특정 상황에서 말하기를 거부하는 불안장애 증상)이란 진단을 받는다.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자기 선택에 따라 특정 상황에서 말하기를 거부하는 질환이었다. 이로 인하여 조승희는 중·고등학교 내내 약물, 심리치료를 받기는 했지만, 큰 문제없이 학교를 졸업했고 성적도 우수해 명문대인 버지니아 공대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사건 발생 이틀 후 미국의 한 방송국으로 우편물이 하나 도착했다. 조승희가 보낸 것이었다. 우편물 안에는, 조승희가 직접 찍은 자신의 사진과 DVD, 범행 선언문 등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 조승희는 본인이 테러범임을 증명하듯 총과 망치 같은 무기를 들고 포즈를 취했고, 영상에서도 본인이 직접 범행동기를 설명했다.
우편물은 범행 당일, 오전 9시 1분에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기숙사에서 1차 범행 이후, 노리스 홀에서의 2차 범행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범행 지역인 버지니아 주에서는 총기를 한 달에 한 자루만 살 수 있다. 조승희는 사건 두 달 전에 미리 총기를 구입했고, 학교 근처 사격장에서 범행을 위한 연습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조승희는 오래전부터 이 범죄를 치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음을 보여준다.
조승희는 영상에서 "누군가 너의 얼굴에 침을 뱉고, 쓰레기를 목구멍에 쑤셔 넣고, 너의 무덤을 파는 느낌이 어떤지 알아?", "너희들은 오늘을 피할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피를 흘리게 했어. 너희는 나를 궁지로 몰았고 나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 결정은 너희가 한 거고, 이제 너희 손엔 절대로 씻을 수 없는 피가 묻을 거야"라고 말한다. 평소엔 말이 없었던 조승희가 영상에서는 세상을 향한 분노를 쏟아내는 모습이다.
학교에서 조승희는 항상 깊게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수업에 들어왔으며, 선글라스를 벗으라는 교수의 지적에도 대꾸가 없었다고 한다. 조승희와 함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도 "동양인이 범인이라고 했을 때 그 학생일 거라 생각했다", "언젠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았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조승희는 글을 쓰는 데 관심이 많았고 소설을 출간하고 싶어 했지만, 출판사에 글을 몇 번 보냈다가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 이야기이거나, 인간 혐오 정서로만 가득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작문 수업에서 서로의 글을 돌려보던 학생들은 조승희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담당 교수조차도 조승희가 차라리 자신의 수업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랄 정도였다.
반면에 학과장 루신다 로이 교수처럼 조승희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사람도 있었다. 로이 교수는 조승희와의 면담에서 "'외로워요. 친구가 전혀 없어요'라는 이야기를 듣고 '네가 정말 슬플 때 아무도 옆에 없으면 얼마나 힘드니'라고 말해줬다. 그가 달라지기를 바랐고 가족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말하기를 꺼려했다"고 회상했다.
작가이기도 했던 로이 교수는 조승희와 개인 교습을 하며 내면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조승희도 로이 교수에게는 조금 마음을 여는 듯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면담에 나오지 않고 다시 혼자만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조승희가 쓴 마지막 글을 보면 "축하한다. 너는 내 삶을 소멸시키는 데 성공했어. 너 때문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약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 내 형제자매 자식들 같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죽을 거야. 내 인생을 파괴해 버리고 나니 행복해? 이제 행복해?"라며 끝까지 원망으로 가득찬 모습이었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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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결정적인 트리거는 주위로부터의 거부"라고 분석하며 "조승희는 '나의 잘못이 아니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책임을 외부로 돌렸다. 그것이 자꾸 쌓이면서 세상을 향한 증오, 분노, 공격성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23세의 조승희는 꿈 많던 서른두 명의 무고한 생명을 빼앗고, 생존자들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끔찍한 기억을 안겼다. 당시 총상을 4발이나 맞고도 기사회생한 피해 생존자들은 지금도 총기규제 캠페인이나 폭력예방재단을 운영하며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안타깝게 사망한 피해자의 유가족 역시, 총기사고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큰 일을 겪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또 어떻게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을지, 늘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프리실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심을 말하고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공유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감정이 있고 어떤 이유로든 괴롭게 되니까.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앞으로 생길 비극과 고통을 방지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사람들 마음속에 악은 왜 자라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총기 사고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최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 범죄', '묻지마 범죄'들이 속출하고 있어서 우려를 자아낸다. 어떤 이유로 범죄를 저질렀든 끔찍한 범죄 자체는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한다. 그것은 가해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 미래의 또다른 피해자들이 같은 비극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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