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희 감독 '휴일'에서 만난 아련한 화양연화
[김규종 기자]
▲ 영화 <휴일> 포스터 |
ⓒ 대한연합영화주식회사 |
오래된 흑백영화를 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언젠가 내가 살았고 그래서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은 공간을 부유하는 인물들의 초상은 쓸쓸함과 안쓰러움, 정겨움을 선사한다. 어느 시점에 나 또한 같은 길을 떠돌았고, 그들과 비슷한 감정과 상황에 괴로워했던 경험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청춘에 내재한 모순과 충돌, 격정과 절망은 판박이처럼 보인다.
1968년 개봉을 앞두었던 이만희 감독(1931-1975)의 <휴일>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검열로 상영관에 내걸리지 못한다. 40대 중반에 불귀의 객이 된 이만희는 살아생전에 51편의 영화를 연출한 다작의 감독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만추>(1966), <휴일>(1968), <삼포 가는 길>(1975)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은 <만추>인데, 이 영화는 네 번이나 다시 제작되었다. 1972년 일본 영화 <약속>으로, <하녀>로 이름을 날린 김기영이 1975년 <육체의 약속>으로, 1981년 문예영화의 거장 김수용 감독이 <만추>로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김태용 감독이 탕웨이와 원빈을 주연으로 내세워 <만추>를 관객에게 선보였다.
전쟁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제외한 이만희의 다른 영화에 그려진 세상은 출구 없는 캄캄절벽의 닫힌 공간이다. 그곳에 던져지는 한 줄기 빛이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지만, 그 또한 녹록지 않다. 팍팍한 인생살이에서 잠시 벗어나 영화관에서 위로를 구하려는 사람들은 이만희 감독의 영화와 거리를 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휴일>에 그려진 서울 1968년
스치듯 지나가는 회색의 벽에 달력이 걸려 있다. 1968년 2월 달력이다. <휴일>에서 관객은 당대 서울의 암담하고 침울하며 막막한 정경과 대면한다. 매운바람이 불어와 수많은 먼지와 휴지를 날리고, 그 바람과 먼지 구덩이 속에서 인물들은 헤매거나 멈춰선 채 숨죽이고 있다. 사물은 운동하고 인간은 정지해 있는 기묘한 모순의 비대칭과 충돌이 화면에 가득하다.
1899년 부설된 서울 전차가 1968년 11월 정지한다. 전차와 승합 버스, 자동차와 리어카, 자전거와 행인들이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채 거리를 채운다. 잿빛의 하늘과 사나운 바람과 표정 없이 흔들리는 사람들과 죽어버린 고요의 정적을 흐느적거리는 풍경이 화면을 채운다. <휴일>의 주인공 허욱(신성일)과 지연(전지연)은 시대의 자동인형처럼 을씨년스럽고 누추하다.
담뱃불을 붙이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애를 먹는 허욱은 계속 담뱃불을 찾는다. 공사판에서 곁불 쬐던 인부들 틈에서 허드레 종이에 불을 붙여서 담배를 태우는 허욱.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작은 불조차 붙일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임을 입증하는 장면이다. <휴일>에 그려지는 1968년 2월의 서울 풍경은 스산하고 눅눅하며 생기가 실종돼 있다.
생기 넘치는 사람은 활기찬 풍경을 만들고, 무기력하고 우울한 인간은 막막하고 출구 없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풍경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풍경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뱃속을 드러내 보이는 건축 현장의 철골 자재는 당대를 살아간 두 청춘의 내장과 그것에 기초한 지금의 일그러진 삶과 미래기획이 비어있음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허욱과 지연
그들은 매주 일요일에 만난다. 1주일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그들의 공통점은 빈털터리라는 사실이다. <휴일>의 미덕은 그들 연인의 과거사와 관계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현대성에 있다. 어느 집 자식이고, 학교는 어딜 다녔으며, 고향은 어디고, 무슨 일하고 살아가는지 시시콜콜 따지고 드는 오늘날 한국의 치정(癡情) 드라마와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지연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사가 처연하게 객석을 울린다. "우린 둘 다 빈털터리예요." 언제부터인지 지연의 심사는 말로 다하지 못할 만큼 쓸쓸하다. 임신 6개월에 접어든 때문이다. 오늘 드디어 지연은 허욱에게 그것을 전한다. 허욱의 반응은 지연이 예상한 그대로다. 미래를 향한 마지막 창문마저, 최후의 빛줄기마저 차단된 2월의 냉기가 뼛속을 스민다.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허욱에게 지연이 밝게 묻는다. "결혼은 어디서 할까요?! 교회당에서 할까요?! 애는 둘만 낳을까요?! 아니, 셋은 돼야겠죠?! 집은 빨간 벽돌집이 좋을 거고요." 당신이 대졸 실업자에 무일푼 청년 허욱이라면 지연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2023년 가난한 연인들처럼 그들도 아이를 지워야 한다는 막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뒤따르는 문제는 자명하다. 수술비 6000원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찬 바람 몰아치는 자유센터 뒤편 남산 기슭에 지연을 남겨두고 외투도 던져두고 허욱은 수술비를 구하러 거리로 나아간다. 전쟁터에서 오갈 데 없이 떠도는 패잔병처럼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돈을 구하는 허욱의 얼굴에도 등짝에도 걸음걸이에도 피로와 패색(悖色)이 완연하다.
▲ 영화 <휴일> 스틸컷 |
ⓒ 대한연합영화주식회사 |
"나를 찾으려거든 술집으로 오라"는 쪽지를 하숙집에 붙여놓고 대낮부터 막걸리를 푸고 있는 억만. 옆자리의 늙수그레한 막노동자를 하대하며 자신을 상찬하는 억만. 이래 봬도 수석으로 고교 나왔고, 대학까지 졸업한 수재임을 강조하는 억만. 하지만 억만 역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떠도는 무직자 신세에 빈털터리 배고픈 청춘에 지나지 않는다.
억만이 자리한 술집의 벽면을 채우고 있는 낙서가 그 시대를 살짝 드러낸다.
"종달새처럼 즐겁게", "태양처럼 뜨겁게"
"냇물처럼 꾸준하게", "망각이란 잊어버리는 것이다"
술 먹는 동안 청춘들은 즐겁고 뜨거우며 꾸준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예찬했으리라!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종달새처럼 즐거운 청춘! 뜨뜻미지근한 청춘이 득시글거리는 풍요의 21세기 청춘과 달리 열기로 가득한 청춘들! 자신에게 제기한 목표를 향해 냇물처럼 꾸준히 정진하겠다는 의지! 하지만 각성의 시간이 찾아오면 그들은 어떤 표정이었을까?!
종달새와 태양과 냇물 같은 자연물을 빗대서 자기네의 내면을 드러낸 청춘들이 도달한 결론은 차마 어둑하고 우울한 것이었다. "망각이란 잊어버리는 것이다." 사전에 나오는 어휘 풀이처럼 허망하게 되풀이되는 구절! 즐거운 종달새도, 뜨거운 태양도, 꾸준한 냇물도 결국에는 잊어버려야 마땅한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1960년대 후반 한국 사회 아니었는가?!
나이 어린 식모를 두고 살아가는 규제는 오늘 하루만 벌써 여섯 번째 욕탕에 들어가 있다. 휴일에 나가봤자 너 같은 실업자 밥 사주고 술 사주는 일밖에 없어서 목욕하며 시간을 죽인다는 규제! 피둥피둥한 몸에 기름기가 흐르는 규제는 허욱을 집으로 들이고, 규제를 기다리다 허욱은 규제의 지갑과 시계에 강렬한 눈길과 마음을 던진다.
살롱의 여인과 허욱의 질주
비어가는 양주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허욱의 눈길이 건너편에 혼자 앉아 있던 여인(안은숙)을 향한다. 여인의 술잔이 비어있다. 여인에게 술을 권하는 허욱. 그들이 조금씩 말을 섞고, 마음을 섞고, 마침내 그들은 차와 경양식을 파는 '아이엘 살롱'을 나와 거리로 나선다. 왕대폿집과 곱창집을 전전하면서 4차, 5차까지 술집을 찾아다니는 그들.
혀가 꼬부라지고 내장이 비틀리며 정신마저 아득해질 무렵 그들은 허욱의 외투를 담요 삼아 공사판 구석에 눕는다. 무엇이었을까?! 이들을 혼곤하게 취하게 하고, 끝없이 흔들리게 한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여인이 말한 것처럼 휴일이 선사하는 무의미와 맹목이었을까?! 막힌 출구 때문에 냉정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여인의 몸을 탐하던 허욱의 육신과 정신을 후려갈기는 한 줄기 청량한 소리가 들린다. 밤 시각을 알리는 교회당 종소리가 그를 후려갈긴다.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여인의 말을 뒤로 하고 허욱은 뛰기 시작한다. 그와 오전 시간을 함께했던 지연을 향해 줄달음치는 허욱. 그를 맞이하는 의사와 간호사의 망연자실한 얼굴에서 절망이 읽힌다.
휘청거리면서도 허욱은 그들을 벗어나 어둠이 지배하는 밤거리로 나가야 한다. 그를 맞이하는 지연 아버지의 분노에 찬 목소리와 거부도, 그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해대는 규제도 그를 결코 아프게 하지 못한다. 그는 물리적-육체적-정신적 충격이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양심의 가책마저 허욱을 떠나 흔들리며 허공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휴일>에 나타난 문제의식
실향민 출신 작가 이범선의 <오발탄>(1959)을 원작으로 한 유현목의 영화 <오발탄>(1961)에 그려진 가난은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풍속도였다. 북에서 내려온 지주 집안 출신의 가장 철호와 그의 실성한 모친, 대학을 중퇴한 무직 동생 영호, 음대 출신 아내, 양공주로 살림을 보태는 막내 여동생 명숙에 이르는 처절한 가난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5.16 군사 정변으로 4.19 혁명을 부정하고 권력을 찬탈한 독재자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를 내세워 1965년 치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 부도덕하고 더러운 베트남 전쟁 파병을 강행한다. 거기서 얻어낸 약간의 돈으로 경제성장을 꾀하지만, 이농(離農)과 서울 집중, 부익부 빈익빈은 악화일로였다. 넘쳐나는 청년 실업과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은 요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피 끓는 청춘들의 욕망은 신분의 수직상승이나 이루지 못할 사랑의 실현 같은 허망함으로 표현된다. 이 지점에서 이만희는 이 같은 허망한 욕망과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준다. 가난으로 꽉 막혀버린 청춘들의 인생 행로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더욱이 <휴일>은 단 하루 만에 일어나는 사건과 갈등과 인연을 밀도 있게 제시한다.
그래서 <휴일>에는 신파조의 애잔한 눈물이나 가슴 저리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한없이 흔들리는 인물들의 눈동자와 허망한 대사와 넋두리, 환영처럼 스러져간 추억이 잠시 소환될 따름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우리의 가슴은 먹먹해지고 눈길은 씀벅거리지만 구질구질하거나 끈적거린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우리가 허욱이나 지연이었다면 어땠을까?!
모든 시대는 나름의 시대정신을 가진다. 권력자와 독재자가 주입하는 사이비 시대정신이 아니라, 시대를 끌어안고 싸우며 전진하는 살아있는 청춘들이 만들어가는 시대정신. 하지만 1960년대 우리나라에는 강고한 시대정신이 부재하다. 그것은 무력에 기초한 군사정권의 가혹한 지배와 폭정이 원인이다. 전위시인 김수영마저 지치고 우울해해야 했던 1960년대!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시대를 앓던 청춘들의 시대정신이 결석했던 암울한 1960년대를 자양분으로 1970년대에 마침내 시대정신이 만들어진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청학련 등이 결성되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줄기차게 펼쳐갔던 저 빛나는 시대정신은 <휴일>에 그려진 무력하고 나약한 청춘들의 살과 뼈를 밑거름으로 배양된 것이다. 그러니, 1960년대를 아쉬워하거나 안타깝게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한다. '화양연화'는 언제든 우리 곁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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