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화가'가 남겨둔 방황의 흔적
[이은영 기자]
▲ 신림동 살인 사건 엿새 후인 7월 27일 오전, 사건 발생 장소 인근에 마련된 추모 공간을 시민들이 바라보고 있다. |
ⓒ 소중한 |
"내가 불행하게 살아서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분노에 가득 차 범행을 했다."
지난 7월 말 세상을 놀라게 한 '신림동 살인 사건' 피의자에게 범행 이유를 묻자, 위와 같이 진술했다고 한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던 사람이, 자기 뜻대로 만들어낸 현실은 그러나 초라했고 동시에 비참했다. 과연 그가 꿈꾸고 바라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던 걸까? 문득 오래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다른 날과 비슷하게, 내 생각과 감정을 이해받지 못한 채 엄마와 싸우고 혼만 난 터였다. 그런 내 마음을 하늘은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 우산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로 부슬비를 내렸다. 발끝만 바라보며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까르륵 웃음소리가 들렸다. 엄마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씌워주는 우산 아래에서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조금 전 느끼던 슬픔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정에 차올라 그 아이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분노에 이글거리는 내 시선이 비를 뚫고 그들에게 가닿았는지, 이내 웃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모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몇 마디를 나누더니 그대로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또다시 등 뒤에서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도 불행하게 만들기 대작전
'행복해 보이는 사람 불행하게 만들기 대작전'에 실패한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길가에 핀 꽃을 노려보고, 나무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꽃잎이 찢어지거나 나무가 쪼개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로 오래 생각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애꿎은 존재에게 왜 그런 행동을 내가 했었는지를.
고독은 작가의 필수 덕목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언젠가 엄마에게 나는 내가 '정서적 고아'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내가 미대에 간 이유도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예술가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나와 닮은 구석이 있어서 그가 내 삶을 응원해 주는 것만 같은 근사한 느낌이 들고는 한다.
모두가 어둠에 둘러싸여 빛을 기다리고 있는데, 빛나는 것이 있어 바라보니 그곳에 예술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비춰보니 빛나고 있다. 그렇게 캄캄한 우주에 홀로 덩그러니 부유하는 기분(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발자취를 통해)을 위로 받는다. 밤하늘의 별이 또 다른 별을 비춰 빛나는 것처럼, '나와 같은 인간이 여기, 저기, 거기에도 또 있구나' 하는 깨달음에서 오는 안도감이랄까.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들이 대부분 불행이라고 부르는 시련을 자기 단련의 도구나 자산의 형태로 바꾸는 종족이 있다. 나는 그들을 위대한 영성가 또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부른다.
삶은 나에게 항상 미소 짓지 않았지만,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 지었다.
-라울 뒤피-
▲ ALT.1 더현대서울현대백화점 라울뒤피의 덕후라 불리는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앙 브리앙이 수년간 기획한 한국의 첫 프로젝트. 더현대 서울은 퐁피두 센터(프랑스 국립 현대미술관)를 건축한 리처드 로저스가 지었다 |
ⓒ 이은영 |
'죽고, 죽이는' 뉴스로 가라앉은 대한민국 서울에, '기쁨의 화가'라고 불리는 라울 뒤피의 전시가 두 곳에서 열리고 있다. 동시에 다른 곳에서 같은 작가의 전시가 열리는 일은 이례적이다. 한 곳은 ALT.1 더현대서울현대백화점(2023.05.17 ~ 2023.09.06)이고, 다른 한 곳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2023.05.02 ~ 2023.09.10)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라울 뒤피의 작품 역시 그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당시에도 예술을 서열화하며 무시되곤 하는 작업이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가치 있고 즐겁다고 느끼면 개의치 않고 몰두했다.
▲ 더현대서울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집 안을 이국적인 분위기로 만들어주는 태피스트리와 검은색과 분홍색을 매치한 ‘블랙핑크’ 도자기 등 라울 뒤피는 인테리어 소품에도 관심이 많았다. |
ⓒ 더현대서울 |
특히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돋보이는데, 이런 노력은 화풍에도 드러난다. 그림이라 하면 대부분 선을 그리고 그 안에 맞춰 색을 칠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색을 먼저 칠하고 그 위에 선을 그려 형태를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선 밖으로 색이 튀어나와 흔들거리며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 전기의 요정 역작으로 꼽히는 ‘전기의 요정’의 연작 중, 라울 뒤피가 죽기 직전까지 과슈(수채물감)로 채색한 유일한 한 점. |
ⓒ 이은영 |
작품 중 무엇보다 내 시선을 잡아끌고, 또 웃음 짓게 만든 것은 바로 다양한 사람들의 초상화였다. 당대 유명 인사의 의뢰를 받아서 초상화를 그릴 때도 그는 여전히 배회했다.
얼굴 옆에 손을 올린 모습을 그렸다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손을 내린 모습으로 고쳐서 얼핏 보면 손이 세 개다. 또 손을 전면에 드러냈다가 지우개로 지우듯 흰 물감을 그 위로 쓱쓱 칠해서 손이 한 개뿐인 초상화도 있다.
▲ 라울 뒤피가 그린 당대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 |
ⓒ 더현대서울 |
당대 석유 재벌가였던 케슬러 일가 초상화가 두 점인 이유도, 원본이 퇴짜를 맞은 뒤 재차 화가가 의뢰인이 원하는 정돈된 방식으로 다시 한 점 그려주었기 때문이다.
현재 전시된 <숲속의 말을 탄 사람들>이 바로 퇴짜 맞은 초상화인데, 말 타고 있는 부잣집 딸내미의 얼굴을 보면 왜 퇴짜 맞았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덕분에 지금의 우리는 그의 개성 넘치는 대형 초상화 원작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 <숲속의 말을 탄 사람들> 석유 재벌가인 케슬러 일가가 퇴짜 놓은 초상화 원작. |
ⓒ 더현대서울 |
자신이 사랑하는 바다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태양빛을 바라볼 때, 순간적으로 시야가 어두워져서 블랙(검은색)이 자꾸 보인다고 그는 말했다고 한다. 세상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그의 통찰력 덕분에 사람들은 조금 더 다정하고 섬세하게 인간의 삶을 음미할 수 있게 됐다.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지 않으면, 어둠 속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 줄 인간을 찾아내려는 악마의 타깃이 되기 쉽다. 자기만의 시련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야기를 풀어갈지는 각자의 몫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꿈이라는 건 사람이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꿈이 자기에게 적합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이 그 사람을 선택한다는 말을 믿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다.
사는 동안 시련은 또 찾아올 것이고, 세상은 매번 내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그걸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겠다는 그 결심이 중요한 것 아닐까.
거대한 빛은 사물을 보게도 하지만 눈을 멀게도 만든다. 라울 뒤피가 "내 눈은 태어날 때부터 추한 것을 지우게 돼 있다"라고 자기 암시를 하며 그렸듯이, 내 안의 깊은 어둠도 나의 기도처럼 눈부신 예술로 승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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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은영 기자 브런치에도 함께 올라갈 예정입니다. https://brunch.co.kr/@yoconis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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