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식 보훈부 장관 말에 헛웃음 친 아이들... 다행이다
[서부원 기자]
"올해 연말 대학교수들이 뽑아낼 사자성어는 보나 마나 '적반하장'일 거예요."
'방귀 뀐 놈이 되레 성내는' 얄궂은 사회가 됐다는 지인의 말에 모두가 맞장구를 쳤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공공연히 퇴행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주는 글귀라고들 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고 가치관이 전도되는 하수상한 시절이라고 입을 모았다.
작년 정부 출범 후 '이명박 시즌 2'라는 기시감은 시작에 불과했다. 현직 검사들이 전공 분야와 상관없이 정부의 요직에 배치되는 것도 상명하복에 길들어진 '정치 초보' 대통령의 불가피한 조처라고 봤다. 백 보 양보해서, 집권 2년 차에도 국정의 난맥상을 죄다 전 정권 탓으로 돌리는 것조차 부족한 정책 역량에 대한 질타를 모면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이젠 현 정부에 대한 '맹목적인 호의'를 거둘 때가 된 듯하다. 저들을 멈춰 세우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의 앞날이 암울할 것 같기 때문이다. 정부의 인사들이 앞다퉈 대통령에게 충성 경쟁하듯 거칠고 비상식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다.
역사적 평가가 끝난 사안을 버젓이 뒤집어 사회적 합의를 깨는가 하면,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당파적 유불리에 매몰되어 모든 사안을 정쟁화하고, 끝내 불의가 정의를 조롱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횡행한다. 차마 미래세대 아이들 보기 민망할 따름이다.
▲ 봉분을 꽃으로 에워싼 백선엽의 묘. 주변엔 존경한다는 글귀를 적은 팻말이 즐비하다. |
ⓒ 서부원 |
특히 역사 교사로서, 분노가 치밀다가 이내 밀려오는 허탈감에 무기력에 빠져들게 하는 사안이 있다. 노골적으로 백선엽 띄우기에 나선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언행에 처음엔 눈과 귀를 의심했다. 삼척동자는 다 아는 명백한 역사 왜곡일뿐더러, 정부가 나서서 온 국민의 '역린'인 친일파 문제를 건드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백선엽 띄우기는 '이승만 우상화'에 이은 후속 작업이었다. 지난 이명박 정권 당시 시동을 걸었다 좌초한 '건국절 논쟁'을 반면교사 삼아 재추진하려는 치밀한 전략의 소산이다. '건국절'을 지정함으로써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폄훼하고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일괄 세탁하려는 의도는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버젓이 살아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추진하는 과정이다. '건국절'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밀어붙여 의도를 들켜버린 '연역적' 방식 대신, 극우적인 여론에 힘을 실으면서 개별적인 사안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하나하나 뒤집는 '귀납적' 방식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기, 승, 전, 건국절'은 현 기득권 세력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해법이다.
백선엽은 본인 스스로 일제의 주구 노릇을 했다고 자백했을뿐더러, 그는 역사학계에서 공히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명토 박은 인물이다. 백선엽은 결코 친일파가 아니라고 우기는 박 장관의 주장은 우리 사회 보편적 상식에 반한다. 게다가 박 장관은 자신의 주장에 애먼 직까지 걸었다.
지난 2020년 백수를 누리고 사망한 백선엽은 국립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건 역사의 정의를 거스르는 일이라는 학계와 시민단체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낙동강 전선을 사수한 6.25 전쟁의 영웅으로서 합당한 예우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해방 직후 미소 냉전과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 6.25 전쟁은 친일파들에게 그들의 과오를 단숨에 씻어내는 더없는 기회가 됐다. 1948년 제주 4.3과 여순 사건을 거치면서 "친일파보다 빨갱이가 더 나쁘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회자됐고, 6.25 전쟁은 반공이 항일을 압도하는 사회로 가는 '화룡점정'이었다.
그렇게 '빨갱이'를 때려잡은 '친일파'는 불세출의 영웅이자 애국자가 됐다. 백선엽을 비롯해 적지 않은 친일파가 6.25 전쟁의 공적 등을 인정받아 서울과 대전의 국립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그것도 가장 높은 위치의 장군 묘역에서 발아래 애국지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국립묘지에서도 반공이 항일보다 우선인 셈이다.
▲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7월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58주기 추모식에 참석하여 추모사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과문한 탓인지,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나란히 모셔져 있는 국립묘지가 '현충'이라는 이름을 달고 조성된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현충'이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기린다는 의미다. 친일파가 목숨 바친 나라와 독립운동가가 목숨 바친 나라가 서로 달라서 생긴 비극이다. 그렇듯 국립묘지는 '양시론적' 역사 공간이 됐다.
엄존하는 분단의 현실을 고려해 파묘하는 대신 친일파들의 공과 과를 함께 적시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어설프게나마 이루어진 건 그래서다. 곧, 일제강점기 민족을 배반했으나 북한의 남침을 막아내는 데 공을 세운 인물로 기억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친일 혐의를 세탁하려는 저열한 목적이었을지라도 사회적 갈등의 확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손바닥 뒤집듯 사회적 합의를 보란 듯이 깨버렸다. 야당의 반발은 말할 것도 없고, 학계와 시민단체의 쏟아지는 비판에도 귀를 닫았다. 그들 스스로 '친일파 감별사'가 되어 조자룡 헌 칼 쓰듯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 그들이 '친일파가 아니라면 아닌' 세상이 됐고, 백선엽의 친일반민족행위는 그들의 의도대로 이내 지워졌다.
현 정부 출범 후,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이승만은 공산군의 침략을 막아낸 '건국 대통령'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덩달아 6.25 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트루먼까지 동상을 세워 이승만의 부활에 조연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제 이승만의 공적을 폄훼하는 사건들은 하나둘 지워지거나 소략해질 게 틀림없다.
▲ 여순사건 후 빨치산이 준동하며 당시 토벌대와 주민 등 다섯 명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화순탄광 옆 현충시설. 안내 표지석에는 여전히 '여순반란사건'으로 적시되어 있다. |
ⓒ 서부원 |
사족.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며 윤석열 정부를 비난하기 전에, 이참에 우리의 우유부단하고 나태한 역사 인식도 성찰하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현행 초중고 교과서에 등재된 사건의 공식 명칭조차 모르는 기성세대가 태반인 현실이다. 사건의 역사적 평가가 담겨 있는 명칭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역사 인식의 기본이다.
일례로,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난'이라고 부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5.18 민주화운동을 아직도 '광주사태'로 부르거나, 여수 순천 10.19 사건(여순 사건)을 '여순반란사건'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5.16 군사 정변을 '5.16 혁명'으로 호명하는 이들도 여전히 많다. 이는 학계의 지난한 노력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는 몰역사적 행태다.
인물이든 사건이든, 앞으로도 관련 사료가 새롭게 발굴되고 재해석되어 학계의 활발한 토론이 벌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아전인수 격으로 명칭이 그때그때 달라진다면, 그걸 어찌 역사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를 느닷없이 애국자로 둔갑시킨 박 장관의 행태에 헛웃음 짓는 아이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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