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는 오늘도 기적같은 '연기'를 합니다

하성태 2023. 8. 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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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태의 사이드뷰] <밀수> 의 흥행 원동력 김혜수에 대하여

[하성태 기자]

 영화 <밀수>에서 해녀 조춘자 역을 맡은 배우 김혜수.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밀수>가 개봉 7일째인 지난 1일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코로나19 이전 여름 흥행시장이었다면 확실히 화력은 떨어진다. 다만, 개봉 첫 주에 관객이 몰리기보다 오른 티켓값 만큼이나 입소문을 중시하는 극장가 흐름을 감안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올 여름 빅4의 다음 타자인 <더 문>과 <비공식 작전>이 나란히 2일 개봉했다. 이를 앞둔 1일 실시간 예매율(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1위가 <밀수>다. 2위 <더 문>(15.6%), 3위 <오펜하이머>(14.1%), 4위 <비공식작전>(13.7%), 5위 <콘크리트 유토피아>(10.3%)를 꺾은 1위 <밀수>의 예매율은 22.2%다.

이로써 개봉 2주 차를 맞은 <밀수>가 한국영화 대작 경쟁 속에 <더 문>과 <비공식작전>을 제치고 흥행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뚜껑을 열자, 예상이 적중했다. 2일 <밀수>는 19만 3000명을, 2위 <비공식작전>은 12만 2000명을, 3위 <더 문>은 8만 9000명을 동원했다. <밀수>가 1위를 지켜냈다.

앞서 배급사 측은 <밀수>의 흥행 요인으로 "특히 20, 30, 40대 관객층이 류승완 감독의 개성 있는 연출과 배우들의 캐릭터 관계성, 시원한 액션 장면에 만족한다면 50, 60, 70대 관객층은 197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음악과 영화의 분위기 그리고 대중성 있는 배우들의 연기에 만족하는 중"이라고 분석했다.

비교적 젊은 관객들은 <베테랑> <모가디슈> 류승완 감독의 이름값과 디테일한 요소들에 주로 호응했고, 장년들은 산울림이나 최헌을 필두로 한 1970년대 노래나 배경, 그리고 친숙한 배우들의 연기에 더 반응한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그 중심엔 김혜수가 위치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존재감도, 젊은 관객들이 주목하는 캐릭터성의 중심인 춘자 캐릭터도, 장년층의 친숙함을 선두에서 이끄는 역할 모두 김혜수의 몫이다.

<밀수>로 처음 김혜수와 작업하는 류 감독이 '팬심'을 고백할 만했다. 류 감독은 충무로에서 정평이 난 한국영화 키드 출신이다. 그러한 존재감 덕분일 것이다. <타짜>의 '정 마담' 이후 김혜수가 출연한 상업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유독 김혜수의 '연기톤'을 둘러싼 언급들이 눈에 띄는 걸 보면.

<밀수>와 <첫사랑> 사이 
 
 영화 <밀수>의 한 장면.
ⓒ NEW
 
얼마 전 쓴 <밀수> 평을 두고 '김혜수의 연기가 오버인 것이 마치 의도적이거나 작품과 연결돼 있다고 하는 것은 글쓴이의 오버이며 김혜수를 캐스팅한 것은 잘못한 것이거나 감독이 중심을 잡아주지 못한 결과'라는 의견이 달렸다. 곰곰이 복기해 봤다. 관객이자 평자로서 똑같이 30년 넘게 지켜 본, <밀수>만이 아닌 30년 김혜수 영화 인생의 연기 톤에 대하여.

1993년 작인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에서 김혜수는 미대 1학년생 영신을 연기했다. 16살 넘게 차이나는 연극반 연출자 창욱을 짝사랑하는 설렘을 독창적으로 형상화한 <첫사랑>은 역시나 20대였던 김혜수에게 최연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199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영화다. 이후 김혜수는 내년이면 청룡영화상을 진행한 지 30년을 맞는다. 그 30여 년이 녹록지 않았다.

<첫사랑>에서 김혜수는 영신의 감정을 과장된 톤과 표정을 통해 때로는 만화적으로, 때로는 연극적으로, 무엇보다 영화적으로 표현한다. 작품 자체가 그랬다. <첫사랑>은 10대의 순수함과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만개해 가는 성년의 교차하는 감정을 활동사진이라 불리는 이유를 증명하듯 '영화적인 모든 것'으로 표현한다.

<첫사랑> 속 김혜수의 연기와 목소리 톤은 과장되지만 현실적이고, 성년인 듯 소녀 같으며, 감정에 붕 뜬 듯하면서도 현실에 안착해 있었다. 김혜수는 관객들에게 영신이 울고 웃는 감정의 천변만화를 납득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한 지극히 영화적인 연기 톤을 이명세 감독과 함께 결정했을 터다.

그런 과장된 연기가 작품의 톤과 맞아 떨어진 계산된 작업이었기에 매력적이고 평가 받았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김혜수는 그렇게 독특한 영화 세계를 자랑하는 이명세의 '뮤즈'가 됐다. 그때 처음 김혜수는 탤런트가 아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첫사랑> 속 김혜수의 연기를 소개한 건 그래서다. '영화인', '배우' 김혜수의 출발이었다.

그때까지 김혜수가 출연한 작품은 (한국영화의 평균이 그러했듯) 최루성 멜로나 청춘 드라마, 에로물 등이 전부였다. 또 후시녹음이 가능한 시대였다. 연극과 영화가 명확히 구분됐고, '탤런트'와 '배우'가 구분되던 시기였다. 중3 때 나이를 속여 가며 데뷔한 <깜보> 이후 소위 '하이틴 스타'로 출발한 김혜수는 젊은 관객들에게 어필한 <어른들은 몰라요>를 거쳐 TV 연기를 통해 건강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후 단 한 번도 스타의 자리에서 내려와 본 적이 없었다.

1980년대는 물론 1990년대까지도 영화계의 주류 장르 중 하나는 멜로나 19금 멜로였다. 심지어 여성 배우들이 종종 노출을 요구받던 시대였다. 건강한 여성 스타 이미지를 구축한 김혜수도 종종 그런 장르 작품들의 섭외가 들어왔다고 한다. <첫사랑>은 흥행에 참패했고, 2000년대 중반까지도 김혜수의 이미지는 계속 소모됐다. 2006년 <타짜>를 만날 때까지 그랬다.

<타짜> 정 마담 전과 후 
 
 영화 <밀수>의 한 장면.
ⓒ NEW
 
"<타짜>를 만나기 전까지 들어온 작품들은 로맨틱 코미디, 코미디. 가끔 난데없이 에로. 그 장르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 업계가 나를 바라보는 시각, 혹은 객관적으로 검증된 나의 역량이 명징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때도 광고도 많이 하고 주인공도 했어요. 근데 배우로서 내 자의식이 어떤 건강한 기능을 하지 않았거든.

영화기자나 평론가들, 전문가 리뷰들 보면 상처를 받기 전에 너무나 현실적이고, 사실은 너무나 정확하거든. 어쩔 땐 그런 생각도 해. 열심히 했는데 왜 나한테만 이렇게 박하지. 힘들고 가슴 아픈 순간은 아무도 모르고 본인만 알아. 그걸 잊어버리면 안 되지만,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기회가 올 수도 있고 평생 안 올수도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난 운은 좋은 거 같아. 근데 끊임없이 노력은 한 거 같아."

거침없다. 자기 자신을 평가하면서도 냉철하다. 그런데도 사람 냄새가 폴폴 난다. 지난 3월, 후배 배우 송윤아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김혜수가 <지금의 김혜수를 만든 것들>이란 인터뷰에서 꺼내놓은 속내다.

TV와 영화에서 스타로서, 주인공으로서 자리를 놓친 적은 없다. 하지만 배우로서 건강한 자의식을 갖추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고, 그 시간 동안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실제 <첫사랑> 이후 김혜수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충무로가 얼마나 김혜수를 소비적으로 낭비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언급한 대로 '에로'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랄까.

'정 마담' 이전까지 소모됐던 김혜수는 이후 날개를 달았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중 하나를 꼽자면, 연기력 논란에서 자유로웠던 김윤희 작가의 드라마 <시그널>은 김혜수의 연기 톤이 왜 중요한지 보여주는 눈여겨 볼 작품이다. 김혜수는 극 설정상 차수현 경위를 연기하며 1995년과 현재를 오가야 했다.

과거의 신입 경찰 차수현은 살짝 과장돼 있고, 현재의 차수현 경위는 냉정하고 차분하면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는 인물이다. 현재의 차수현은 미스터리를 쫓는 내레이터이면서도 비극의 중심에 선 감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

반면 과거의 차수현은 짝사랑의 감정까지를 표현하면서도 회상 장면의 한 톤 높은 연기를 소화해 내야 한다. 이 모두를 김혜수는 설득력 있게 표현해 냈다. 지극히 계산적인 연기다. 특히 과거 장면은 중심인 조진웅과 함께 김혜수가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복잡한 시나리오를 자신의 색깔로 소화해내는 김혜수도 '이 작품이다'라고 하는 시나리오를 받게 된 일이 비교적 최근이라고 말한다. 시나리오 복이 많은 건지, 노력파인지에 대한 질문에 김혜수는 앞서 소개한 영상에서 이렇게 답했다.

"솔직히 김혜수가 작품을 그나마 잘 본다, 라고 하는 건 최근이야. 왜냐면 이 작품이다, 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들어오지 않았던 기간이 사실 굉장히 길거든. 30대 때 혼자 상처 받았던 적이 있어. 충무로에서 나름 똘똘하기도 하고 똘똘한 척은 하지만 시나리오 보는 눈이 없는 게 김혜수였거든. 그건 뭐냐면 내가 좋은 시나리오를 만날 수 있는 베이스를 갖추는 데 얼마나 많은 공력을 들였느냐가 출발인 것 같아.

난 그런 베이스가 없었거든. 실력도 없었고, 일찍 시작해서 연기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많이 소모가 됐기 때문에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사람들은 굳이 내가 필요하지 않은 거야. 나보다 새롭고 잘하는 사람, 가능성 있는 사람이 많았고. 나는 늘 애매한 사람이야. 새롭고 신선하진 않지만 무언가를 뛰어넘는 배우는 아니거든."

<지금의 김혜수를 만든 것들>이란 인터뷰에서 꺼내놓은 속내다.

<타짜> 이후 김혜수는 대중이 사랑한 마성의 캐릭터로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획득했다. 본인이 잘 하는 영역과 또 걸어온 길을 자각했고, 영화계가, 대중들이 선호하는 연기 톤이 변화하는 과정을 목도했으며, <타짜>의 정 마담으로 스스로의 연기  톤을 조절할 줄 아는 '필요한' 배우로 살아 남았다. 그게 지금 우리가 <밀수>로 만나는 김혜수의 오늘이다.  
 
배우 김혜수의 오늘을 만든 원동력

 
▲ 김혜수, 혜수와 '밀수' 김혜수 배우가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의 한 상영관에서 열린 영화 <밀수> 시사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밀수>는 바다에 던져진 생필품을 건지며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 앞에 일생일대의 큰 판이 벌어지는 해양범죄활극이다. 류승완 감독이 연출하고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김종수, 고민시 배우 등이 출연했다. 26일 개봉.
ⓒ 이정민
 
개인적으로, 배우이자 자연인 김혜수의 신중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영화인인 지인으로부터 영화계 현안에 이름을 올릴 때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김혜수의 모습을 전해 듣곤 했다.

또 한 번은 벌써 5년 전 장면이다. 2018년 70주년을 맞은 제주4.3의 의의를 알리는 캠페인에 많은 유명인과 셀럽 등이 참여했는데 김혜수도 그중 하나였다. 문소리, 안성기, 김의성 배우들도 함께였다.

그 당시 조심스레 건넨 섭외를 신중하게 수락한 김혜수는 캠페인 영상 촬영에 나서기까지 장고를 거듭했다. 유족들이나 피해자들이 살아 있고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받는 사안인 만큼 본인이 카메라 앞에 나서서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 신중을 기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자기 자신을 평가하며 "끊임없이 노력은 한 거 같아"라고 말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자연인이 얼마나 될까. 그 신중함이, 노력들이 그 자체로 프로페셔널 배우 김혜수의 오늘을 지탱하게 만든 원동력이었으리라. <밀수>에서 춘자의 한 톤 높은 연기 또한 바로 그 신중한 계산, 노력에서 비롯된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밀수>의 해녀 춘자는 남자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 남았다. 1985년에 데뷔한 김혜수도 남성들의 권위가 우세했던 영화계에서 지금껏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K배우의 대명사가 됐다. 남성 관객들이 요구하던 여성성을 연기하는 것을 뛰어넘어 여성 관객들이 응원하는 대한민국 대표 '언니' 배우가 됐다. 그 김혜수가 이제 <밀수>라는 대표작 한 편을 보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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