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희, 그는 갔어도 투혼의 흔적은 남아 있다

지창영 2023. 8. 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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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글] 민족작가연합 상임대표 고 강기희 작가를 기억하며

[지창영 기자]

 강기희 작가가 민족작가연합 회원들에게 정선 평화의 소녀상 건립 내력을 소개하고 있다. 필자가 본 강 작가의 마지막 모습이다.
ⓒ 지창영
 
강기희 작가의 영전에서는 사뭇 떨리는 목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강기희… 상임대표님… 민족작가연합 회원들이 인사 드립니다."

강기희라는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삶의 무게가 엄습하면서 휘청하고 말았다. 웬만한 자리에서는 매정할 정도로 평정하던 내가 그의 영정 앞에서 한마디 한다는 것이 그만 진폭이 너무 커져 버렸다. 8월 3일 아침 7시 50분, 발인을 앞두고 민족작가연합 회원들이 별도로 모여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하루 전에 조문을 하고 발인을 보겠다며 남은 회원들이 일곱이었다. 더 많은 회원들이 남고 싶어했으나 피할 수 없는 일정 탓에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가야 했다. 박금란 공동대표, 옥효정 사무총장, 심종숙 전 사무총장, 동분선 회원, 김영수 회원, 정회영 회원 그리고 공동대표인 내가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내가 본 강기희 작가의 마지막 모습

강기희 작가가 민족작가연합 상임대표로 선출된 것은 2022년 9월 24일로, 전임 상임대표인 김창규 목사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서였다. 강 작가는 상임대표를 맡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당시 암 투병 중이어서 그를 추천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하던 때였다. 요양에 전념해야 하는 사람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창규 당시 상임대표는 생각이 달랐다. 그에게 걸맞은 직분을 주는 것이 오히려 그의 투병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강 작가도 틀림없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박금란 공동대표가 당사자에게 타진해 본 결과 김창규 목사의 생각은 적중했다. 강 작가는 망설임 없이 상임대표직을 수락하겠다고 했다. 명예욕과는 전혀 상관없는 수락이었음은 물론이다. 상임대표로 선출되고 나서 그는 통일문학상을 제정하자고 제안했다. 이 시대 최대 과제가 통일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그러한 시대적 사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지적하면서 내놓은 제안이었다. 통일문학상은 민족작가연합의 사업으로 채택되었다.

사북항쟁 43주년을 맞아 올해 1월 27일 정선 사북읍종합사회복지관에서 열린 사북문학축전을 민족작가연합이 주관한 것도 상임대표로서 그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병마와 싸우느라 야윈 몸으로 간간이 숨을 몰아쉬며 사회를 보고 대담을 진행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 행사가 인연이 되어 4월 21일 정선 사북읍 뿌리관에서 열린 사북민주항쟁 43주년 기념식에도 민족작가연합이 시와 노래로 참여하게 되었다.
 
 지난 1월 행사를 진행하는 강기희 민족작가연합 상임대표의 모습
ⓒ 지창영
 
행사에 참여한 12명의 회원들은 그날 밤 미리 정한 일정에 따라 덕산기 계곡에 있는 숲속책방을 찾았다. 2017년부터 강 작가가 운영하는 책방이었다. 강 작가의 지인들이 합류하다 보니 그날 밤을 함께한 이들은 20여 명이 되었다. 서울, 인천, 대구, 광주 등 각지에서 모여든 회원들을 대하는 강기희 상임대표의 얼굴은 유난히 밝아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노래까지 주고 받으며 두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약해진 몸 상태로 투약도 해야 하고 일찍 숙소에 들어야 했기 때문에 더 길게 함께하지는 못했다.

다음날 강기희 대표의 안내로 일행은 정선 아라리촌을 방문했다. 먼저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봤다. 강기희 작가가 주도하여 2020년 8월 15일 건립한 것이었다. 소녀상 건립을 추진하면서 그가 정선군청 웹사이트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은 아직도 남아 있다.

"정선의 아픔, 기억하지 않으면 진실은 사라집니다.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고 평화를 약속하는 일, 정선이 합니다. … 인구 3만 6천의 작은 동네 정선에서 벌이기엔 벅찬 일이지만 해 보겠습니다."

이어서 돌아본 것은 '거물 친일파 이범익 영세불망비 단죄문'이었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파 이범익을 단죄하는 내용으로서 그를 기리는 영세불망비 옆에 세워져 있다. 단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정선아라리촌에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파 이범익의 영세불망비가 있으매, 당장이라도 철거하고 싶은 마음 크지만 이 역시 우리가 품어야 할 아픈 역사임에 이 자리에 고이 두고자 합니다. 대신, 우리는 이 비석이 일제강점기에 행해졌던 친일반민족 역사의 중요한 현장으로 남길 바라며,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과 후세들을 위한 친일 교육 현장과 친일 연구 자료로 활용되길 소망합니다."

이날 우리를 안내하면서 소녀상과 단죄비 건립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소개하던 모습이 내가 본 강기희 작가의 마지막 모습이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움푹 들어간 볼, 메말라서 그런지 유난히 길어 보이던 손가락,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형히 빛나던 눈빛…

그는 갔어도 그 투혼의 흔적은 남아 있다

제주 4.3 유격대사령관 김달삼을 소환하여 역사의 진실을 찾아 나서는가 하면(<위험한 특종 ― 김달삼 찾기>) 연산과 그의 아들 이황을 불러내어 우리 시대의 정의는 무엇인지 묻기도 했고(<연산의 아들, 이황-김팔발의 난>) 1980년대를 청춘으로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시대의 의미를 묻고 현재의 청년 세대에게 위로를 주기도 했던(<이번 청춘은 망했다>) 작가 강기희. 그는 작가로서 작품으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시대를 살았다.

그는 갔어도 그 투혼의 흔적은 남아 있다. 여러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시집으로 남아 있고, 평화의 소녀상으로 남아 있고, 정선 화암동굴 입구에 서 있는 친일파 박춘금 단죄비에도 남아 있다. 작품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낸 그는 민족작가연합 상임대표로서 최고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가 쓰러진 것은 병마 때문이 아니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일에 열중했다. 투병은 성가신 일과가 하나 늘어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암 따위가 그의 생명을 끊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비록 일찍 갔지만 결코 진 것이 아니다. 끝이 올 때까지 할 일을 했다. 그리고 그가 페이스북에 남긴 것처럼 웃으며 갔다. 그러니 암은 지고 만 것이다. 강기희의 승리다. 우리는 그의 뒤를 이어 민족, 민중, 자주의 길을 걸어 통일의 날을 열고야 말 것이다. 그날은 강기희가 부활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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