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이제 군사동맹 단계로 나아가는 것인가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리투아니아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일 빌뉴스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한 뒤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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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를 군사동맹으로 격상하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가시화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모양새로 진행되고 있지만, 일본이 원치 않는 일을 미국이 추진하기는 힘들므로, 일본의 의도가 현 상황에 많이 개입돼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난 1일 자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 태평양 억지력 강화 위해 도쿄와 서울의 안보 연계 강화를 희망(US seeks to deepen Tokyo-Seoul security links to boost Pacific deterrence)'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상황에 정통한 네 명에 따르면, 백악관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억지력을 강화하기 위해 두 태평양 동맹국을 좀 더 긴밀하게 만들기를 원한다"라고 보도했다. 두 태평양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을 긴밀하게 만드는 방법에 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은 이달 있을 캠프 데이비드의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역사적인 공동성명을 추진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공격받을 시 각국이 상대방과 협의할 의무가 있다는 데 동의하기를 원한다."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 제2조는 "당사국 중 어느 일방의 독립 또는 안정이 외부로부터의 무력 침공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라고 규정했다.
제3국에 의한 공격이 발생할 경우에 조약 당사국이 자동으로 협의하는 '안보 협의 의무화'는 군사동맹 관계의 핵심적 요소다. 어떤 형태로 도출되든 간에 이런 합의가 체결되면 한국과 일본은 명실상부한 군사동맹국이 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비슷한 것을 한일 양국도 갖게 된다.
▲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장관(사진 오른쪽)이 지난 4월 27일 목요일 워싱턴 펜타곤에서 열린 행사에서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다. |
ⓒ AP=연합뉴스 |
당시의 상황 전개와 맥락을 고려할 때, 위 공동성명은 이미 진행 중인 군사정보 교환이나 연합군사훈련 등을 정례화 혹은 제도화하거나(A), 아니면 한 단계 더 높은 군사동맹을 추진(B)하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현 단계에서 곧바로 B로 넘어가기는 힘들므로, 한편으로는 A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이번처럼 B의 가능성을 언론에 흘리는 양상이 앞으로 한동안 지속되리라 전망할 수 있다.
3일 자 한국어판<미국의 소리>에 따르면, 미 국방부는 '한일 양국의 안보 협의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느냐'는 질의에 대해 "역내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우리의 상호 노력과 관련해 소통을 촉진하기 위한 모든 일을 하기 위해 두 나라와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답변했다.
딱 부러지게 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소통을 촉진하기 위한 모든 일"에 안보 협의도 포함되므로 <파이낸셜타임스> 보도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소리>는 미 국방부의 애매한 답변을 소개하면서도 "바이든 행정부가 오는 18일 열리는 미한일 정상회의를 한국과 일본 간 안보 협력을 진전시킬 기회로 삼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인용한 것이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량살상무기 조정관을 지낸 게리 세이모어(Gary Samore)의 발언이다.
세이모어 전 조정관은 "미국은 동맹국들이 국방 협력과 협의를 증대시키고 있다는 점을 북한과 중국에 보여주고 싶어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동맹을 형성한 3국이 협력하고 협의하는 모습을 북·중 양국에 보여주고 싶어 한다고 했다. 미국이 희망하는 한일관계의 '진도'에 관한 발언이다.
이와 관련해 <파이낸셜 타임스>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윤석열 정부와 기시다 후미오 내각 하에서 한일동맹이 성사된 뒤에 한국의 차기 정권에 의해 이것이 번복될 가능성을 미국이 우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에는 중앙정보국(CIA) 출신으로 오바마 행정부 때 NSC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일본 전문가로 일하는 크리스토퍼 존스턴(Christopher B. Johnstone)이 거론됐다. 이 보도에 따르면, 존스턴은 18일에 나올 한미일 공동성명이 획기적인 성과가 될 거라면서 "두 나라의 미래 지도자들이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 되리라고 발언했다. 다음 정권이 윤석열 정권을 부정하더라도, 사실상 한일동맹만큼은 손댈 수 없게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말이다.
위안부나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다 끝났다며 문제 해결을 기피한다. 앞으로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이 표현을 한일동맹과 관련해서도 듣게 될지 모른다.
미국이 앞장서서 추진하더라도 결국은 일본이 관리해야 하는 것이 한일동맹이다. 한일동맹이 성사된 뒤에 한국에서 이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나오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성사된 동맹'이라는 논리가 일본 내각과 극우진영에서 나올 수도 있다.
▲ 지난 2월 독도 인근 공해상서 펼쳐진 한미일 미사일방어훈련 모습 |
ⓒ 연합뉴스 = 합참 제공 |
상황에 따라서는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체결할 수 있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일본과 동맹을 맺는 것은 위험하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이나 중국·러시아의 위협을 근거로 일본과의 안보 협력을 정당화하지만, 현 상태에서 한일동맹으로까지 나아가면 북·중·러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한국을 위협하는 상황이 얼마든지 조성될 수 있다.
2018년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이후에 조성된 한일 간의 경색 국면을 해소시키는 과정에서 윤석열 정부가 구사한 방법은 이른바 '굴욕외교'다. 굴욕외교를 통해 손을 다시 잡았다는 것은 수평적이 아닌 수직적 관계가 한일관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불평등 상태에서 군사동맹을 체결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은 1900년 의화단 사건 직후의 한일동맹 추진에서도 나타났다.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군대를 출동시켜 조선 정부를 제압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킨 뒤 동학군을 진압했다. 이로 인해 일본이 조선을 좌지우지하게 되자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이런 고종을 겁주기 위한 조치 중 하나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이다.
이 상태에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1896년에 발생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격히 증대되고 러·일이 공동으로 간섭하는 구도가 조성됐다. 이런 세력균형에 힘입어 고종이 1897년 10월 12일(음력 9월 17일)에 성사시킨 것이 대한제국 선포다.
하지만 그해 11월 14일에 독일이 산둥반도 교주만을 점령하자, 러시아는 유럽 열강의 북중국 진출을 견제할 목적으로 '한반도보다는 만주'에 치중하는 전략으로 돌아섰다. 이 때문에 1898년부터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1894년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점차 강해졌다.
이런 정세 속에서 1900년에 중국에서 발생한 것이 반외세·반제국주의·반기독교 운동인 의화단운동이다. 일본·영국·러시아·미국 등 8개국 군대가 출동해서 진압해야 했을 정도로 이 사건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같은 중국의 급변사태를 빌미로 일본이 요구한 게 바로 한일동맹이다. 일본의 의도를 우려한 고종이 군사동맹보다 중립국화를 희망하는데도 일본은 개의치 않고 밀어붙이려 했다. 2006년에 나온 <호서사학> 제45집에 실린 역사학자 현광호의 논문 '의화단사건 이후 일본의 대한정책'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
"하야시 주한일본공사는 의화단사건이 발발하자 한국의 남부 지방을 일본의 세력권으로 편입하려 했고, 이후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한반도를 일본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려 했다. 이 때문에 하야시는 한국의 중립화를 강력히 반대하고 한일동맹을 추진했다. 하야시는 한국 정부가 의화단 사건에 대비하여 군사력 증강을 추진하자, 한국에 차관을 제공하여 5만 명의 상비군을 창설할 것을 제의했다. 하아시는 차관 제공의 조건으로 한일군사동맹을 추진했다."
일본이 한일동맹을 추진하면서 한국 남부를 세력권에 편입시키려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한일관계가 수직적이고 불평등했기 때문이다. 1894년에 대일 굴욕이 있고 난 뒤에 추진된 것이었기에, 이 시기의 동맹 추진은 한국의 주권을 위험에 빠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결국 한일동맹이 굳이 필요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은 일본의 군사기지로 전락했고, 뒤이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은 피보호국이 됐다. 일본이 군사동맹을 추진한 지 얼마 뒤에 보호국 관계가 성립됐다는 것은 일본이 희망한 한일동맹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절감하게 만든다. 수직적이고 불평등한 가운데서 추진되는 군사동맹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해주는 사례다.
2023년, 지금의 한일관계는 대등하지도 않고 수평적이지도 않다. 한일관계에서 안 그래도 열세였던 한국은 윤석열 정권의 굴욕외교로 인해 한층 더 열악한 지위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군사동맹이 추진된다면, 이것이 의화단사건 직후에 추진됐던 것보다 더 나은 것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본 입장에서는 더 나은 것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한국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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