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나이 먹을수록 주권이 줄어든다?
여명(餘命)비례투표제. 김은경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장이 지금은 22세인 아들이 중학생 시절 했다고 전한 말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아들의 생각은 이랬다.
“우리들의 미래가 훨씬 더 긴데, 왜 미래 짧은 분들이 1대1 표결을 하느냐. 평균 연령을 얼마라고 봤을 때 자기 나이로부터 여명을 따져 비례적으로 투표해야 한다.”
이 논리대로면 평균 기대수명을 83세라고 할 때 신생아는 한 표, 14세는 0.83표, 60세는 0.28표가 되는 셈이다. 평균 연령보다 더 살면 그만큼 누군가의 표를 갉아먹는다. 김 위원장은 이를 전하며 “되게 합리적이지 않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1인 1표’라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맞는 말”이라고 했다.
합리적이지도, 맞지도 않다. ‘노인 폄하’로만 소비되는데 그 이상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납세 같은 국민적 의무를 더하는데도 주권이 줄어든다는 황당한 귀결이어서다. 1인 1표, 즉 보통·평등선거란 대원칙에 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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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 폄하 논란 '여명 비례 투표'
보통·평등 원칙 반하는 황당 주장
1인 1표 이상과 현실 괴리는 고민
」
그런데 지금이야 1인 1표가 너무나 당연하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반드시 모든 사람에 의해 검토되고 승인받아야 한다”(Q.O.T.)는 원칙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었다(『선거는 민주적인가』). 그러나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은 아니었다. 소수, 특히 재산을 가진(또는 납세 실적이 있는) 남성이었다. 18세기 말 프랑스 제헌의회에선 ‘활동적 시민’에게 투표권을 준다고 했는데 납세자였다. 신생 미국의 유권자도 본질적으로 유산자(有産者)였다. 1960년대까지 투표하려면 인두세(주민세 비슷)를 내야 했다.
‘동일한 주권’ 원칙이 확고했던 것도 아니다. 노동자와 여성 참정권 확보를 위해 분투한 존 스튜어트 밀도 복수투표권(plural)을 주장했다. 그는 “글을 읽지도 못하고 쓸 수도 없으며 기초적인 산수를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고 했다. 보다 뛰어나고 현명한 사람에게 더 큰 발언권을 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봤다.
1인 1표는 그러므로 수백 년에 걸친 참정권 운동이 20세기까지 이뤄낸 성취로 볼 수 있다.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유권자의 자격 여부를 따지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 성공했다. 그전엔 ‘1원(圓) 1표’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이 논쟁은 그러나 종결형이 아니다. ‘누구나’에 미성년자(그리고 외국인)는 포함되지 않아서다. 온전한 판단력을 갖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인데,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도 어느덧 18세까지 내려갔다. 2004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주 상원의원은 더 나아가 14세까지 낮추자고 제안했다. 이들 청소년의 표 무게가 어떠했을까? 14·15세는 0.25표, 16ㆍ17세는 0.5표였다.
결국 김 위원장의 전언은 투표권 논쟁사 전개와 정반대 얘기인 셈이다. 모르고 전했다면 무식한 거고, 알고도 전했다면 무치(無恥)한 것이다. 이제 와 “아이들 기를 죽지 않게 하기 위해 ‘그 말도 맞겠구나’라며 대화했다” “정치언어를 몰랐다”고 했지만 무리한 해명이다.
다만 한 가지는 걸린다. ‘1인 1표의 현실적 어려움’이라고 말한 대목이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지만, 선거한다고 민주주의가 저절로 꽃피진 않는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데, 유권자들이 정작 중시하는 건 선거를 앞두고 불과 몇 달 사이의 주머니 사정이곤 했다. 문재인 정부가 고전하다 재난지원금을 뿌리고선 총선에서 승리한 게 그 예다. 합리적으로 견주어 보기보다는 당파적 심장에 따른다. 정치 고관여층은 과다 대표되고, 미래 세대와 사회적 약자는 과소 대표되는 경향도 강하다. 선거 결과를 두고 집단적 의사 결정으로 해석하곤 하지만, 실상은 동전던지기에 가깝다.
김 위원장의 신상은 어느 쪽으로든 정리될 것이다. 그에 분노하더라도 ‘1인 1표’의 이상과 현실 간 괴리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하는 시간을 냈으면 좋겠다.
고정애 Chief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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