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나기의 휴식 | “돈은 없지만 맛있는 차는 마시고 싶어”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3. 8. 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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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지차 오이시이(맛있어)~~~”

땡볕이 내리쬐고 매미가 맴맴 울어대는, 한여름의 절정일것 같은 시기에 두 여성이 집 앞에 앉아 있다. 두 사람 앞에 놓인 탁자 위에는 얼음이 동동 뜬 차와 경단이 준비되어 있다. 그중 한 명이 먼저 차를 마시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지차 오이시이~”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일본 10부작 드라마 ‘나기의 휴식’ 中)

이 장면 때문일까. 해마다 무더운 여름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차가 바로 호지차다. 도쿄도 그렇지만 교토의 7월은 무척이나 뜨겁다.

교토는 일본 차 문화의 꽃이 피었던 지역인 데다 기차로 20분만 가면 일본 3대 녹차 산지로 꼽히는 우지가 자리한 만큼, 전통이 유려한 찻집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중 교토에서 8대째 영업 중인 ‘잇포도’ 찻집은 현재 잇포도를 운영하는 8대째 며느리 와타나베 미야코가 펴낸 책 <차의 맛> 한국 번역본이 나오면서 한국인에게도 유명해졌다. 어느 더운 여름날 오후, 땀을 뻘뻘 흘리며 교토 잇포도를 찾아가 시원한 냉침호지차 한잔 시켜 “호지차 오이시이~” 하며 마셨던 그 맛을 몇 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는 것은 갈증을 해결해준 시원함 때문이었을까, 정말 호지차가 엄청나게 맛있던 때문이었을까.

어느 여름 나기는 보따리 하나 둘러메고 도쿄 인근 조그만 빌라로 들어간다. 그렇게 ‘나기의 휴식’이 시작된다.
호지차는 일본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차 중 하나다. 일본에 말차와 녹차 외에 차가 또 있다고? 일본 식당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차가 바로 우롱차와 호지차다.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술 못 마시는 고로 상이 식사를 하면서 항상 외치는 말이 “우롱차 한 잔 더 주세요”다. 식당마다 우롱차를 내는 곳이 있고, 호지차를 내는 곳이 있다. 물론이건 일반적인 식당 얘기고, 좀 더 고급인 ‘스시야’ 같은 곳에서는 주로 가루녹차를 내놓는다.

우롱차도 많이 들어봤고, 가루녹차도 알겠는데 호지차는 처음 들어봤다는 분이 많을 터. 호지차는 우리로 치면 보리차 같은 차다. 보리차처럼 끓여서 물처럼 마시기도 하고, 여름에는 얼음 띄워 시원하게 마신다. ‘호지’라는 이름을 가진 뭔가로 만든 차인가 싶지만, 사실은 녹차의 한 종류다.

인류의 먹거리 발전은 싸구려 재료로 좀 더 맛있게 먹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다. 차의 역사에서 보면 ‘밀크티’가 그렇고 인도의 ‘마살라짜이’도 그렇다. 싸구려 홍차는 쓰고 떫어 그냥 마시기 쉽지 않다. 그래서 우유도 넣고 설탕도 듬뿍 넣어 마신 게 바로 밀크티다. 마살라짜이는 또 어떤가. 전 세계 홍차의 상당량을 생산하는 인도지만, 괜찮은 찻잎은 다 유럽에 보내고 정작 인도인 앞에 남은 차는 부스러기나 아주 급이 낮은 찻잎 정도였다. 당연히 그걸로 차를 우리면 맛이 별로. 그래서 고안해낸 게 그 찻잎을 끓인 물에 인도인이 즐기는 여러 향신료를 잔뜩 넣어 푹푹 끓여낸 짜이다. 그렇게 인도인이 좋아하는 향과 맛을 내는 ‘짜이’가 만들어졌다.

비싸고 품질 좋은 녹차는 귀족 차지… 남은 것은 싸구려 녹차
하급 녹차 볶아서 우려보니 구수하고 좋아… 호지차의 탄생
일본 찻집에서 ‘센차’를 주문하면 이렇게 우려 마실 수 있게 나온다. 일본에서는 ‘규스’라는 이름의 주전자 모양 다기에 차를 우려 마신다.
호지차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차 문화는 말차가 중심이고 녹차가 뒤를 받친다. 말차가 중심이긴 하지만 말차는 ‘다도’에서나 보기 쉬울 뿐, 사실 일본인이 가장 많이 마시는 차는 녹차다. 그런데 비싸고 품질 좋은 녹차는 다 상류 계급이 차지하고 서민은 좋은 녹차를 구경하기 어려웠다. 품질이 좋지 않은 녹차 또한 우려봐야 좋은 맛이 나지 않는다. 이리저리 고민하다 어느날 누군가 하급의 녹차를 볶아서 우려봤더니 구수하고 먹기 편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게 바로 ‘호지차’다. 결국 호지차는 ‘녹차를 볶아낸 차’인 셈이다. 잎만 볶은 게 아니다.
‘센차’(왼쪽)와 녹차를 볶은 ‘호지차’(오른쪽) 건엽
녹차 줄기도 함께 볶았다. 보통은 잎과 줄기가 섞여 있는데, 가끔 줄기만 볶은 것도 있다. 이를 ‘쿠키차’라 부른다. ‘쿠키’는 일본어로 줄기라는 의미다. 오늘 얘기할 스토리는 왓챠와 웨이브에서 만날 수 있는 일본 10부작 드라마 <나기의 휴식>이다. 영화 <일일시호일>과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 주인공으로 유명한 쿠로키 하루가 주인공 ‘나기’로 나온다. 제목 <나기의 휴식>은 주인공 ‘나기’의 ‘휴식’이라는 의미다.

곱슬머리 비주얼이 강렬한 나기는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직원이다. 소심지수 100, 아싸의 전형인 나기는 좀처럼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을뿐더러 늘 동료 눈치를 본다. 심지어 다른 동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상사에게 질책을 당하면서도 사실을 얘기하지 않고 그저 “죄송합니다”라며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머리를 조아린다. 도시락을 싸와놓고도 동료들이 식당에 가자 하면 어쩔 수 없이 따라가고, 식당에 가서도 자기 얘길 하는 게 아니라 누가 무슨 얘길 하면 “맞아, 나도 그런 적 있어” 하며 맞장구를 칠 뿐이다. 자기를 디스하는 것 같은 말에도 그저 웃으면서 “뭔지 알아”하며 억지웃음을 짓는 나기. 속으로는 “그렇지 않아” 말하고 싶다고 외치지만, 나기 입에서 그런 말은 절대 나가지 않는다.

그런 나기에게 비밀이 있었으니… 사실 곱슬머리 비주얼을 회사 동료들은 전혀 모른다. 아침마다 나기가 1시간씩 고데기로 머리를 정성스레 쭉쭉 펴서 단정하게 만들고 회사에 가기 때문에. 그뿐인가. 나기가 다니는 회사의 가장 잘나가는 최고 인싸 영업사원 가몬 신지가 바로 나기의 남자친구다. 심지어 신지도 나기가 곱슬머리인 것을 모른다. 혼자 사는 나기의 집에 신지가 와서 자고 갈 때도 나기는 아침 일찍 신지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 혹여 신지가 알아차릴세라, 곱게 머리를 펴고 단정한 모습으로 신지 앞에 나타나므로.

그러던 어느 날, 나기는 회사에서 신지와 동료들이 얘기하는 것을 우연히 엿듣는다. 여자친구에 대해 묻는 동료들에게 신지는 “그 애가 나를 좋아해서 만나는 것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콘센트를 일일이 다 뽑고, 밥해 먹는 것도 빈티 나고, 그렇게 쪼잔한 여자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덧붙이기까지 하면서. “속궁합은 최고”라며 낄낄거리기도 하고. 그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받은 나기는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하는 공황 상태에 빠져버리고, 다음 날 회사에 사표를 낸다. 쇠뿔도 단김에. 바로 도쿄 집을 정리하고 짐도 다 버리고는 도쿄 인근 소도시의 1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조만간 철거가 시작될 작은 빌라로 이사를 간다. 이불 하나와 옷 몇 가지 챙긴 보따리 하나 들고. 그렇게 나기의 ‘찬란하고 멋진 어느 여름날의 휴식’이 시작된다….

호지차로 만든 빙수(왼쪽)와 우려낸 호지차(오른쪽) 녹차를 볶은 호지차는 우렸을 때 갈색의 탕색을 띤다
나기가 “호지차 오이시이~”를 외치는 장면은 3화에서 나온다. 새로 이사 간 곳에서 나기는 친구를 한 명 사귄다. 도쿄대를 졸업한 수재지만 사회성과 일머리가 부족해 취직을 하지 못하는 사카모토다. 사카모토를 불러 집 앞에서 함께 호지차와 경단 타임을 즐기는 와중에 나기는 시원한 호지차를 한 잔 들이켜고는 “호지차 오이시이~” 하며 격하게 감탄사를 내뱉는다.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나기가 맛난 차 한 잔에도 실컷 감동하고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나름 의미가 담긴 장면이다.

‘쓰러져가는 빌라 앞 탁자에 놓인 경단과 시원한 호지차 한 잔’이라는 묘사에서 알 수 있듯, 호지차는 서민이 마시는 대표적인 차다. 당연히 가격도 저렴하다. 일본 유명 브랜드 줄기가 섞인 쿠키호지차의 경우 50g을 일본 돈 1000엔 정도면 구입할 수 있다. 일본에 말차, 녹차, 호지차 외에 무슨 차가 또 있을까? 사실 일본에는 말차와 녹차가 거의 전부다. 다양한 녹차가 있을 뿐이다. 볶은 녹차인 호지차도 결국 녹차의 일종이다.

일본 유명 찻집 ‘잇포도’의 호지차
일본 녹차는 우리가 흔히 아는 녹차와 살짝 다르다. 찻잎을 따서 뜨거운 불에 덖어 만드는 녹차가 아니라 ‘쪄서 만드는 녹차’이기 때문이다.

일본 녹차는 자세하게 나누면 수십 종류가 넘는다. 크게는 교쿠로(옥로), 센차(전차), 반차, 호지차, 겐마이차 등으로 구분한다. 사실 일본 녹차는 그냥 ‘센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센차’는 한자로 ‘煎茶’라고 쓰는데 ‘우려내는 차’라는 의미다. 교쿠로는 센차 중 고급차, 반차는 센차 중 살짝 품질이 낮은 차(센차를 만들기 위해 채엽한 후 좀 더 자란 여름 찻잎으로 만든 녹차)를 가리킨다. 일본 녹차 시장에서 센차가 차지하는 비율이 68%, 반차가 20%로 센차와 반차가 거의 90%다. 이 외에 고급 센차인 교쿠로가 5%, 말차가 2%, 호지차와 겐마이차를 비롯한 기타 차가 5%를 점유한다. 교쿠로까지 포함하면 센차 비율이 93%인 셈이다.

일본에서 말차가 차지하는 비율 2%에 불과
93%는 ‘센차’라 불리는 증청(찐) 녹차가 차지
센차는 1738년 나가타니 소엔이라는 인물이 가공법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토에서 태어난 소엔은 우지 근처에서 살면서 차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우지는 차의 중심이었고, 16세기 중반 우지에서 차광재배법이 개발된다. 채엽 20일 전쯤 녹차밭에 지붕을 만들어 ‘차광’을 해주면 찻잎에 엽록소가 증가해 더 진한 녹색을 띠고 고소한 감칠맛이 배가된다. 그렇게 만든 말차는 비싼 가격에 팔려나갔다. 그러나 차광재배는 허가받은 사람만 할 수 있었다. 일반인은 말차를 생산하고 남은, 품질이 별로인 차를 우려 마셨는데 당연히 맛이 별로였다. 소엔은 어떻게 하면 차광재배를 하지 않은 찻잎으로 더 맛있는 차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 ‘호이로’라는 독특한 기구를 만들어낸다. 마치 당구대처럼 생긴 판 아래에 열을 공급하기 위한 장치를 덧붙였다. 증기로 쪄낸 녹차를 호이로 위에 올려 유념(비비기)하고 건조시켰다. 증기로 쪄내어 수분을 잔뜩 머금고 엉킨 찻잎을 풀어냈다 말렸다 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뾰족뾰족 바늘 같은 모양’의 차가 만들어졌다. 이게 바로 센차의 시작이다. 흔히 들어본 ‘다도’가 말차를 즐기는 방식이라면, 센차를 즐기는 방식은 ‘센차도’라 한다.
호지차라테는 말차라테처럼 호지차를 우려낸 후 우유를 섞어 만든다.
일본 녹차의 맛은 ‘우마미’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일종의 ‘감칠맛’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다만 우마미는 호불호가 강하다. 개인적으로는 ‘MSG 맛’이 강한 우마미를 썩 즐기지 않는다. 겐마이차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한국인에게 아주 익숙한 차다. 겐마이차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현미녹차’다. 티백으로 자주 접한 그 ‘현미녹차’가 맞다. 다만 비주얼은 다소 다르다. 한국에서는 현미녹차가 가루 중심 티백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겐마이차는 진짜 녹차 잎(반차)에 진짜 볶은 현미를 섞었기 때문에 녹차 잎 사이사이 자잘한 갈색빛 나는 현미가 섞여 있는 모양새다. 볶은 현미를 섞은 만큼 겐마이차도 구수한 맛이 나고 마시기에도 편하다. 호지차가 하급의 차를 맛있게 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겐마이차의 탄생 비결도 유사하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 제목에 빗댄다면, ‘돈은 없지만 맛있는 차는 마시고 싶어’쯤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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