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나기의 휴식 | “돈은 없지만 맛있는 차는 마시고 싶어”
땡볕이 내리쬐고 매미가 맴맴 울어대는, 한여름의 절정일것 같은 시기에 두 여성이 집 앞에 앉아 있다. 두 사람 앞에 놓인 탁자 위에는 얼음이 동동 뜬 차와 경단이 준비되어 있다. 그중 한 명이 먼저 차를 마시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지차 오이시이~”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일본 10부작 드라마 ‘나기의 휴식’ 中)
이 장면 때문일까. 해마다 무더운 여름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차가 바로 호지차다. 도쿄도 그렇지만 교토의 7월은 무척이나 뜨겁다.
교토는 일본 차 문화의 꽃이 피었던 지역인 데다 기차로 20분만 가면 일본 3대 녹차 산지로 꼽히는 우지가 자리한 만큼, 전통이 유려한 찻집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중 교토에서 8대째 영업 중인 ‘잇포도’ 찻집은 현재 잇포도를 운영하는 8대째 며느리 와타나베 미야코가 펴낸 책 <차의 맛> 한국 번역본이 나오면서 한국인에게도 유명해졌다. 어느 더운 여름날 오후, 땀을 뻘뻘 흘리며 교토 잇포도를 찾아가 시원한 냉침호지차 한잔 시켜 “호지차 오이시이~” 하며 마셨던 그 맛을 몇 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는 것은 갈증을 해결해준 시원함 때문이었을까, 정말 호지차가 엄청나게 맛있던 때문이었을까.
우롱차도 많이 들어봤고, 가루녹차도 알겠는데 호지차는 처음 들어봤다는 분이 많을 터. 호지차는 우리로 치면 보리차 같은 차다. 보리차처럼 끓여서 물처럼 마시기도 하고, 여름에는 얼음 띄워 시원하게 마신다. ‘호지’라는 이름을 가진 뭔가로 만든 차인가 싶지만, 사실은 녹차의 한 종류다.
인류의 먹거리 발전은 싸구려 재료로 좀 더 맛있게 먹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다. 차의 역사에서 보면 ‘밀크티’가 그렇고 인도의 ‘마살라짜이’도 그렇다. 싸구려 홍차는 쓰고 떫어 그냥 마시기 쉽지 않다. 그래서 우유도 넣고 설탕도 듬뿍 넣어 마신 게 바로 밀크티다. 마살라짜이는 또 어떤가. 전 세계 홍차의 상당량을 생산하는 인도지만, 괜찮은 찻잎은 다 유럽에 보내고 정작 인도인 앞에 남은 차는 부스러기나 아주 급이 낮은 찻잎 정도였다. 당연히 그걸로 차를 우리면 맛이 별로. 그래서 고안해낸 게 그 찻잎을 끓인 물에 인도인이 즐기는 여러 향신료를 잔뜩 넣어 푹푹 끓여낸 짜이다. 그렇게 인도인이 좋아하는 향과 맛을 내는 ‘짜이’가 만들어졌다.
하급 녹차 볶아서 우려보니 구수하고 좋아… 호지차의 탄생
곱슬머리 비주얼이 강렬한 나기는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직원이다. 소심지수 100, 아싸의 전형인 나기는 좀처럼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을뿐더러 늘 동료 눈치를 본다. 심지어 다른 동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상사에게 질책을 당하면서도 사실을 얘기하지 않고 그저 “죄송합니다”라며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머리를 조아린다. 도시락을 싸와놓고도 동료들이 식당에 가자 하면 어쩔 수 없이 따라가고, 식당에 가서도 자기 얘길 하는 게 아니라 누가 무슨 얘길 하면 “맞아, 나도 그런 적 있어” 하며 맞장구를 칠 뿐이다. 자기를 디스하는 것 같은 말에도 그저 웃으면서 “뭔지 알아”하며 억지웃음을 짓는 나기. 속으로는 “그렇지 않아” 말하고 싶다고 외치지만, 나기 입에서 그런 말은 절대 나가지 않는다.
그런 나기에게 비밀이 있었으니… 사실 곱슬머리 비주얼을 회사 동료들은 전혀 모른다. 아침마다 나기가 1시간씩 고데기로 머리를 정성스레 쭉쭉 펴서 단정하게 만들고 회사에 가기 때문에. 그뿐인가. 나기가 다니는 회사의 가장 잘나가는 최고 인싸 영업사원 가몬 신지가 바로 나기의 남자친구다. 심지어 신지도 나기가 곱슬머리인 것을 모른다. 혼자 사는 나기의 집에 신지가 와서 자고 갈 때도 나기는 아침 일찍 신지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 혹여 신지가 알아차릴세라, 곱게 머리를 펴고 단정한 모습으로 신지 앞에 나타나므로.
그러던 어느 날, 나기는 회사에서 신지와 동료들이 얘기하는 것을 우연히 엿듣는다. 여자친구에 대해 묻는 동료들에게 신지는 “그 애가 나를 좋아해서 만나는 것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콘센트를 일일이 다 뽑고, 밥해 먹는 것도 빈티 나고, 그렇게 쪼잔한 여자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덧붙이기까지 하면서. “속궁합은 최고”라며 낄낄거리기도 하고. 그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받은 나기는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하는 공황 상태에 빠져버리고, 다음 날 회사에 사표를 낸다. 쇠뿔도 단김에. 바로 도쿄 집을 정리하고 짐도 다 버리고는 도쿄 인근 소도시의 1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조만간 철거가 시작될 작은 빌라로 이사를 간다. 이불 하나와 옷 몇 가지 챙긴 보따리 하나 들고. 그렇게 나기의 ‘찬란하고 멋진 어느 여름날의 휴식’이 시작된다….
‘쓰러져가는 빌라 앞 탁자에 놓인 경단과 시원한 호지차 한 잔’이라는 묘사에서 알 수 있듯, 호지차는 서민이 마시는 대표적인 차다. 당연히 가격도 저렴하다. 일본 유명 브랜드 줄기가 섞인 쿠키호지차의 경우 50g을 일본 돈 1000엔 정도면 구입할 수 있다. 일본에 말차, 녹차, 호지차 외에 무슨 차가 또 있을까? 사실 일본에는 말차와 녹차가 거의 전부다. 다양한 녹차가 있을 뿐이다. 볶은 녹차인 호지차도 결국 녹차의 일종이다.
일본 녹차는 자세하게 나누면 수십 종류가 넘는다. 크게는 교쿠로(옥로), 센차(전차), 반차, 호지차, 겐마이차 등으로 구분한다. 사실 일본 녹차는 그냥 ‘센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센차’는 한자로 ‘煎茶’라고 쓰는데 ‘우려내는 차’라는 의미다. 교쿠로는 센차 중 고급차, 반차는 센차 중 살짝 품질이 낮은 차(센차를 만들기 위해 채엽한 후 좀 더 자란 여름 찻잎으로 만든 녹차)를 가리킨다. 일본 녹차 시장에서 센차가 차지하는 비율이 68%, 반차가 20%로 센차와 반차가 거의 90%다. 이 외에 고급 센차인 교쿠로가 5%, 말차가 2%, 호지차와 겐마이차를 비롯한 기타 차가 5%를 점유한다. 교쿠로까지 포함하면 센차 비율이 93%인 셈이다.
93%는 ‘센차’라 불리는 증청(찐) 녹차가 차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 제목에 빗댄다면, ‘돈은 없지만 맛있는 차는 마시고 싶어’쯤 될 수 있겠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돈 1만9900원에 80곳 경기 여행...경기도 ‘투어패스’ 출시 - 매일경제
- 버리는 폐식용유에서 노다지를?...LG화학, 바이오디젤 항공유 사업 추진 - 매일경제
- 네이버 주가 4%대 강세...“하이퍼클로바X 세계적 파급력 기대” [오늘, 이 종목] - 매일경제
- [속보] 분당 서현역서 흉기난동...범인은 20대 배달업 종사자 “불상의 집단이 청부살인하려 해서
- 한류홀딩스, 국내 기업 11번째 나스닥 상장 완료...880만달러 조달 - 매일경제
- 고령층 5명 중 1명 ‘나 혼자 산다’...소득·취업도 불안정 - 매일경제
- [속보] 전국 말라리아 경보 발령…질병청 “원충 확인” - 매일경제
-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도입 검토되는데...여론 82% “찬성” [민심레이더] - 매일경제
- 한국 ‘여권 파워’ 세계 3위...만년 1위 일본 제친 국가는? - 매일경제
- 카카오뱅크 ‘최대 실적’ 냈지만...매수·매도 의견 엇갈리는 증권가, 왜? [오늘, 이 종목] -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