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인 죽음' 선택했지만… 효력 발휘 못 하는 연명의료결정법

오상훈 기자 2023. 8. 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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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교육] ④ 임종 시기 수일 앞당기는 데 그친 현행 연명의료결정법​
임종을 지켜본 의료진들은 현행 연명의료결정법 아래에서는 연명의료에 관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사실상 지킬 수 없다고 말한다./사진=연합뉴스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뒤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됐다.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등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거부할 수 있다는 법적 근거가 골자였다. 이로써 조금 더 주체적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는 사회적인 기대감이 형성됐다. 의식이 없을 걸 대비해 건강할 때 연명의료를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문서도 작성할 수 있게 됐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지난 6월 기준 약 184만명에 이른다.

그런데 실제 의료현장에서 환자와 보호자들의 기대는 무너지고 있다. 연명의료 중단 사례의 90%는 환자의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 연구팀이 2018년 2월부터 2021년 2월까지 3년간 서울대병원 임상윤리 지원 서비스에 의뢰된 총 60건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다. 왜 그런 걸까?

◇건강할 때, 가족 갈등 막으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184만건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려면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이 환자가 ‘임종 과정’이라는 의료진의 판단과 연명의료를 거부한다는 환자의 의사 표시다. 환자의 의사는 대게 연명의료계획서로 밝힌다. 

환자가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할 수 없는 상태라면 가족들이 대신할 수 있다. ▲평소 환자의 의사에 대해 환자 가족 두명 이상이 동일하게 진술하거나 ▲환자 가족 전원이 합의하면 된다. 다만 부모나 형제의 죽음을 직접 결정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합의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가족들의 고초를 막는 수단으로 떠오른 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연명의료계획서가 말기 환자에게 직접 물어봐서 작성하는 문서라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 성인이 건강할 때, 연명의료에 관한 의사를 밝혀두는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건수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2018년 10만여건에서 2019년 53만여건, 2021년 115만여건을 거쳐 2023년 6월 184만여건이 작성됐다.

◇제3자인 의사가 임종 과정이라고 판단해야 연명의료 중단 가능
그런데 연명의료계획서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든 환자의 자기결정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아무리 연명의료 관련 의사를 밝혀둔다고 해도 의료진 2인 이상이 ‘임종 과정’이라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연명의료계획서의 법적 효력이 발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임종 과정이란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를 받더라도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돼 사망이 임박한 상태를 뜻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90대 노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응급실에 방문해도 연명의료는 적용된다. 급성 손상에 대한 수술이 끝나면 중환자실로 옮겨져 인공호흡기를 달고 승압제 치료도 받는다. 상태가 나빠지면 심폐소생술도 받는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연명의료를 받으며 한달 가량을 보내다가 장기 부전이 오고 혈압이 더 이상 유지가 안 돼 누가 봐도 임종이 임박했을 때가 돼야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효력이 발생한다.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고윤석 교수는 “연명의료 관련 의사를 밝혀둔 환자들은 내가 죽을 때 인공호흡기나 투석 치료를 안 받겠다는 결정이 존중받을 거라고 기대한다”며 “그러나 현행법은 제 3자인 의사 두 명 이상이 ‘임종 과정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없게 돼있다”고 말했다.

◇임종 전 호전·악화 반복, “가족들이 연명의료 중단해달라고 부탁”
말기상태와 임종 과정을 무 자르듯 나누기란 어렵다. 곧 사망할 것 같은 환자도 집중 치료를 받으면 다시 호전되기도 한다. 말기 암으로 의식을 잃었지만 체온, 호흡, 맥박 등 활력 징후가 어느 정도 유지되면 임종 과정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박중철 교수는 “몇 가지 질환의 임종 과정을 판단하는 지침이 있긴 있다”며 “혈압, 산소 포화도, 환자의 의식 등이 기준인데 약의 효과로 혈압만 올라도 임종 과정이라 보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또 “연명의료에 관한 환자의 의사가 반영되는 시기가 늦어지다 보니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은 임종 시점을 수일 앞당기는 데 그칠 뿐”이라며 “그 전에 반혼수상태의 환자가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걸 지켜본 가족들이 먼저 연명의료를 중단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의료진 입장에선 가족의 부탁들 들어주기 어렵다. 법 위반 소지가 있어서다. 우리나라는 치료 거부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임종 과정이 아닌 환자의 연명의료를 중단하면 고소당할 여지가 있다. 실제 환자의 증상이 완화됐는데 병원이 연명의료를 중단했다고 고소한 사례는 많다. 지난 4월에도 지인의 목을 졸라 살해한 60대가 병원의 잘못된 연명의료 중단 결정으로 피해자가 사망했다며 의료진 3명을 고소했다. 이럴 때 의료진의 방어권은 임종 과정을 제대로 판단했느냐로 보장된다.

◇윤리위원회 있어야 연명의료 중단, 요양병원 7.7%만 설치
연명의료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막는 장애물은 임종 과정 판단 절차만 있는 건 아니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도 있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란 해당 의료기관 내에서 심의, 상담 등 연명의료 전반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현행법상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병원은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설치돼 있거나 기관이 설치된 병원과 협력 관계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열람할 수 있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설치 비율은 요양병원은 물론, 종합병원도 높지 않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상급종합병원의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설치 비율은 100%지만 종합병원은 58.2%, 요양병원은 7.7%에 그친다. 전체 연명의료 중단 결정 사례의 97%는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에서 이뤄지는 이유다. 고윤석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의 한해 사망자 중 상당수는 요양병원에서 사망하지만 대부분은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설치가 어려우며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설치된 기관과의 협약도 쉽지 않을 것”이라며 "환자의 자율성이 보다 존중되려면 의료기관윤리의원회가 설치되어 있지 않는 요양기관에서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기 환자도 연명의료 중단할 수 있어야, 의료진-환자 협의가 핵심
현재로선 연명의료를 원천 거부하려면 병원에 가지 않아야 한다. 돌봄 등을 이유로 병원엔 가야겠지만 연명의료는 싫다면 호스피스에 가면 된다. 말기 판정 후 입원할 수 있는 호스피스 기관은 연명의료를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않는다. 연명의료 중단 역시 의료진 1인의 판단으로 가능하다. 담당 의사가 환자나 보호자와 협의해서 “인공호흡기 치료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할 수 있는 대상 질환은 말기 암, 후천성 면역 결핍증, 만성 폐쇄성 호흡기 질환, 만성 간경화, 만성 호흡부전 등에 그친다. 게다가 대다수 환자들이 대기를 걸어놓을 만큼 병원도 없고 인력도 없다.

전문가들은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협의 과정을 일반 병동에도 옮기려면 임종 과정이라는 기준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고윤석 교수는 “법 개정을 통해 질환 말기단계에서도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며 “그래야 의료진과 환자가 연명의료 중단을 두고 협의해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최대한 보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들도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신문고·국민생각함이 지난해 9~10월 6200명에게 적절한 연명의료 중단 시기에 대해 물었더니 47.7%가 말기 환자까지 중단이 가능해야 한다고 답했다. 18.1%는 말기 이전에도 허용해야 한다고 답했고 34.2%는 지금처럼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만 허용해야 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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