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조한 미국도 재정 악화 탓 신용등급 12년만에 강등…한국은 괜찮나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전격 강등했다. 주된 이유로 국가 재정 악화가 꼽힌다. 재정 건전성에 이미 빨간불이 켜진 가운데 전례 없는 고령화에 직면한 한국도 남의 나라 얘기로 치부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피치는 1일(현지 시간)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IDRs·장기외화표시발행자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췄다. 3대 국제 신용평가사가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내린 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지난 2011년 ‘AAA’에서 ‘AA+’로 낮춘 이후 12년 만이다. 등급 전망은 기존 ‘부정적 관찰 대상’에서 ‘안정적’으로 변경했다.
피치는 강등 배경으로 향후 3년간의 미국 재정 악화 및 국가 채무 부담 증가를 꼽았다. 피치는 미국 연방 정부의 세수 감소 및 재정 지출 증가 영향으로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 적자 비율이 지난해 3.7%에서 올해 6.3%로 오르고 2025년에는 6.9%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의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올해 112.9%에서 2025년 118.4%로 오를 것으로 피치는 분석했다.
보다 장기적인 시계에서도 피치는 미국 재정 상황을 부정적으로 봤다. 고령화 여파 탓이다. 피치는 “인구 고령화와 의료비 상승으로 재정 개혁이 없는 한 고령층에 대한 지출이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악화하는 재정 상황을 관리할 미국의 능력에 대해서도 피치는 의문 부호를 제기했다. 미국 정치권이 부채한도 상향 문제를 놓고 대치하는 일이 반복되는 상황을 두고서다.
미국 경기에 대해서는 “신용 여건 악화와 투자 감소, 소비 하락이 미국 경제를 올해 4분기와 내년 1분기 약한 침체로 밀어 넣을 것”이라며 침체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국의 2분기 경제 성장률이 시장 예상을 웃돈 2.4%(전 분기 대비‧연율 기준)를 기록하는 등 최근 양호한 미국 경제 지표가 잇따라 발표되면서 ‘연착륙’ 가능성이 나온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이날 피치 결정에 대해 카린 장 피에르 미국 백악관 대변인은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세계 주요 경제권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회복세를 이끌고 있다”며 반발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도 “자의적이며 오래된 데이터를 토대로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영향으로 2일 국내 금융 시장은 출렁거렸다. 이날 코스피는 전날보다 1.9%(50.6포인트) 떨어진 2616.47에 거래를 마쳤다. 코스닥지수는 909.76을 기록해 전날보다 3.18%(29.91포인트) 하락했다. 달러 당 원화가치는 1298.5원에 거래를 마쳤다. 전날보다 14.7원 떨어졌다. (환율은 상승)
아시아 금융 시장도 얼어붙었다. 이날 일본 닛케이225지수(닛케이 평균주가)는 전 거래일 대비 2.3% 떨어졌다. 홍콩 항셍지수도 전날 대비 2.34%, 중국의 상하이종합지수는 0.91% 각각 하락했다.
이와 관련 방기선 기획재정부 1차관은 이날 시장 상황 점검 회의를 주재하며 “아직까지 시장에서는 2011년 S&P의 미국 신용등급 하향 때보다 영향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나 향후 안전 자산 선호 심리가 심화되며 국내외 시장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이 상존한다”며 “관계기관 간 긴밀한 공조체계를 유지하는 한편 필요시 시장 안정을 위한 조치를 신속히 시행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도 향후 국가신용등급 하향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정부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50.4%로 추정된다. 경기 부진에 따른 세수 악화로 지난 5월 말 기준 국가채무는 1088조7000억원을 기록하며 정부의 올해 전망치(1100조3000억원)에 근접했다. 올해 국가채무 비율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여파 등으로 이 비율은 급속도로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해 11월 조세‧재정개혁이 없다면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2060년에 144.8%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이미 신용평가사들은 들은 한국 재정에 대해 꾸준히 경고 목소리를 냈다. 무디스는 지난 5월 한국의 신용 등급을 유지하면서도 “한국의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 통계적 압력이 생산성 향상과 투자에 부담을 주고 재정적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GDP 대비 3% 관리하겠다는 내용의 재정준칙 법안은 국회에서 장기 표류 중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비교적 경제 상황이 양호한 미국에 대해서도 재정 악화를 이유로 국가 신용등급을 내릴 만큼 신용평가사들은 국가 재정 상황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라며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신용등급 하향으로 받는 영향이 적지만 한국의 경우 신용등급이 낮아지면 자본 유출 위험이 커진다”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국가채무 비율60%를 넘기면 신용 등급 평가가 부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 만큼 재정 건전성 유지를 위해 정부와 국회가 협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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