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실루엣을 해방시킨 혁명가

이준목 2023. 8. 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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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럭셔리는 편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럭셔리가 아니다."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남는다."

'패션의 제왕'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 혹은 코코 샤넬, 1883-1971)이 남긴 어록들이다. 샤넬(CHANEL)은 루이 비통-에르메스와 함께 세계 3대 명품 패션 브랜드로 꼽힌다. 그리고 이 샤넬 제국의 설립자인 가브리엘 샤넬은 지난 100여 년간 모든 여성들의 워너비이자 '20세기 최고의 패션 아이콘'으로 불린다.

8월 2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0회에서는 '파란만장한 삶 위에 세운 샤넬제국'편을 통하여 샤넬의 일대기와 그녀가 패션계에 남긴 영향을 조명했다. 서이자 연세대 문화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샤넬은 '현대 여성복의 시초'로도 불린다. 여성복은 샤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만큼 그녀가 남긴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또한 사후에도 그녀가 남긴 브랜드는 연 20조가 넘는 매출을 올리며 기업가치로 10억 유로(약 140조 원, 2019년 기준)를 상회하는 거대한 패션 제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고국인 프랑스에서의 샤넬은, 과대평가 논란이나 나치 스파이 행적 등을 놓고 반응이 극과 극으로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이기도 하다.

샤넬은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샤넬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하고 불우했다. 12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샤넬은 12세에 어머니를 잃고,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샤넬은 몽유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훗날 샤넬은 당시를 떠올리며 "나는 12살에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때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회상했다.

샤넬이 태어났던 19세기 프랑스는 남성에게만 시민권을 보장했고 남편 없이는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걸 보호받지 못할 만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무책임하고 무능한 아버지가 남긴 트라우마들은, 샤넬이 훗날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존심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샤넬은 이 당시 얻은 인생의 깨달음으로 "나는 아주 어렸지만, 사람은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돈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때부터 샤넬은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성공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품게 된다.

샤넬은 19세부터 생계를 위하여 보조 재봉사, 음악 카페의 마스코트걸 등으로 활동했고, 가수에도 도전했으나 좌절하기도 했다. 샤넬은 카페에서 짧은 공연을 하며 사람들에게 불리기 시작한 애칭이 그녀의 대표적인 별명인 '코코'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23세의 샤넬은 카페의 단골손님이었던 에티엔 발상이라는 인물을 만나 사귀게 되었고, 그의 제안으로 발상의 성에서 한동안 기거하게 된다. 하지만 하층민이었던 샤넬은 낯선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성 안에서 부유층 남성들과 치장한 여성들 사이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오기가 생긴 샤넬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하여 당대의 고급 스포츠인 승마에 도전하면셔 훗날 그녀의 삶을 바꾸게 되는 패션의 세계에 우연히 첫 발을 내딛게 된다. 보수적이었던 당시 사회에서는 여성은 바지를 입는 것이 금지되었고 말에 탑승하려면 치마를 입고 다리를 한쪽으로 모은 채 비스듬히 앉아야했다. 하지만 샤넬은 남성용 승마바지를 자신의 사이즈에 맞춰서 개량하고 착용하고 등장하여 승마를 즐겼다. 당시만 해도 시대를 앞서간 파격이었던 샤넬의 패션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당시의 여성복들은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강조하여 여성의 신체적 특성이나 건강, 실용성을 고려하지 않은 패션들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였다. 바닥이 땅에 끌릴만큼 길고 무거웠던 드레스, 엉덩이 라인을 살리기 위하여 활동성을 제한한 호블 스커트, '개미허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허리를 꽉 조르는 코르셋처럼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불편하고 충격적인 패션들이 대거 유행했다. 이러한 시대에 대중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바지를 입고 말을 타는 샤넬의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깨달음을 얻은 샤넬은 이후 자립의 길을 고민하다가 '모자 디자이너'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당시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가발 착용이 금지되면서 대신 모자를 쓰는 게 상류층 여성에게는 필수가 됐다. 샤넬은 당시의 과장되고 불편한 디자인에서 벗어나 실용성을 중시한 모자를 선보이면서 여성들에게 뜨거운 인기를 누리게 된다.

샤넬은 이 시기에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연인이자 조력자가 되는 영국인 아서 카펠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샤넬은 카펠을 '보이(Boy)'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보이는 잘생기고 비밀스럽고 매혹적이었다. 단순히 잘생긴 게 아니라 눈이 부셨다. 그는 내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였다"고 회상할 만큼 남다른 감정을 드러냈다.

당시는 여성이 사업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던 시절이기에, 카펠은 경제적으로 어려워하는 샤넬을 위하여 돈을 빌려주는 가하면, 사업에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않으며 적극적인 후원자로 나섰다. 샤넬은 카펠의 도움으로 파리 1구에 자신의 첫 모자가게를 열 수 있었다. 훗날 샤넬의 수석 다지이너였던 칼 라거펠트가 2011년 카펠의 애칭에서 유래한 '보이백'을 출시하며 경의를 표했을 만큼 카펠은 샤넬의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될 각별한 존재였다.

모자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샤넬은 이번에는 여성복 전체를 디자인하는 의상 디자이너에 도전했다. 당시 파리는 전 세계의 패션 수도로 불리웠고, 고급 맞춤복을 제작하는 의상실인 '오트쿠튀르'가 성황을 이뤘지만 의상 디자이너인 '쿠튀리에(Courturier)'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자인 데다 전문적인 디자인 교육을 받지못한 샤넬에게는 넘기 힘든 현실의 벽이 놓여있었다.

샤넬은 파리 대신 다른 도시를 먼저 공략하자는 카펠의 조언에 따라 파리 인근의 휴양지인 도빌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샤넬 부티크'를 오픈했다. 당시 상류층은 휴양지에서조차 불편한 드레스와 거대한 모자를 착용하곤 했다. 샤넬은 철저히 실용성을 강조하여 얇고 시원한 복장에, 당시 여성복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주머니'를 장착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단행하여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노년에 이른 1959년 당시 인터뷰에서는 여성복에 대한 샤넬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 샤넬은 작업에서 가장 어려운 점을 질문받자 "여성들이 쉽게 활동하면서도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은 듯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답했다. 덧붙여 샤넬은 "태도나 행동이 드레스에 따라 바뀌지 않게 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몸은 항상 움직이니까"라는 철학을 밝혔다. 샤넬이 생각하는 최고의 럭셔리란 바로 '편안함'이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14년, 1차 세계대전은 샤넬에게는 위기이자 기회였다. 프랑스가 전쟁에 휘말리며 도빌 인근의 가게들이 일제히 문을 닫아야 했지만, 샤넬은 부티크를 닫지않았다. 그런데 전쟁을 피해서 프랑스의 상류층들이 대거 도빌로 피난을 오면서 유일하게 문을 닫지 않았던 샤넬의 부티크로 몰려들며 전화위복이 되었다.

자신감을 얻은 샤넬은 전쟁이 한창이던 1915년에는 중립국인 스페인의 휴양도시 비아리츠에 또다른 부티크를 오픈하면서 유럽의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당시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에 따르면 '샤넬의 의상을 최소한 한 벌이라고 갖고 있지 않으면 유행에 뒤처진 것'이라고 표현할 만큼 샤넬의 높은 인기와 위상을 보여준다.

샤넬의 다음 목표는 파리 패션계 진출이었다. 샤넬은 편안함과 활동성, 우아함을 겸비한 새로운 여성 정장을 만들기 위하여 당시 남성들의 잠옷이나 속옷 제작에만 쓰이던 '저지' 원단을 활용하여 정장을 제작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사실 초기에는 저급 원단이라는 이유로 반응이 엇갈렸지만, 1차대전을 거치며 전선으로 나간 남성들의 공백을 대신하여 중-상류층에서도 '여성이 최초로 일터에 나가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능성과 실용성을 중시한 샤넬의 여성 정장이 더욱 각광을 받는 전화위복이 됐다.

샤넬의 저지 정장은 훗날까지도 세계 패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언론에서는 '캐주얼한 저지 정장이 우아한 스타일을 대체하다', '샤넬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그의 영향력이 느껴진다'고 높이 평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샤넬과 패션의 진보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이처럼 샤넬은 사회 변화속에서 패션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상을 제시한 인물로 등극했다.

1919년 12월, 승승장구하던 샤넬의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평생의 연연이자 후원자였던 '보이' 아서 카펠이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것. 샤넬은 소식을 듣자마자 자동차로 19시간을 달려서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카펠은 운명은 달리한 뒤였고, 샤넬은 부서진 자동차 잔해를 쓰다듬으며 몇시간이나 오열했다고 한다. 좌절한 샤넬은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집안의 인테리어를 모두 검은색으로 칠했다고 전해진다.

연인을 잃은 아픔을 잊기 위하여 샤넬은 더욱 일에만 몰두하는 워커홀릭이 됐다. 샤넬은 자신의 브랜드를 상류층에서 일반 대중으로 넓히기 위하여 노력했고, 그녀가 선택한 다음 도전은 '향수' 사업이었다.

샤넬이 '여성의 향기가 나는 여성의 향수를 만들고 싶다'는 목표를 표방하며 1921년에 발표한 '샤넬 NO.5'는 의상과 함께 오늘날까지 샤넬을 대표하는 브랜드이자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며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60년 4월, 당대의 섹시스타였던 배우 마릴린 먼로가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뭘 입냐고 질문하는데 전 샤넬 no.5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니까"라고 답한 인터뷰는 엄청난 화제를 불러오면서 샤넬 향수의 폭발적인 인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샤넬은 여성들이 착용하는 진주목걸이를 패션 아이템으로 전환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부유층 여성들이 착용하던 보석은 그 여성을 보호하는 남성의 재력이나 지위를 대변하는 개념이 강했다. 사실 샤넬은 개인적으로는 보석을 착용하고 다니는 여성을 "수표를 걸고 다닌다"고 비아냥거릴 만큼 거부감이 심했다. 하지만 값싼 인조 보석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방식을 통하여 재창조해내며 과시용으로만 여겨지던 보석을 패션화시키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줬다.

또한 샤넬이 선보인 '리틀 블랙 드레스'는 본인이 오래 고수해왔던 패션의 궁극적인 결정체와도 같은 아이템이었다. 샤넬이 어린 시절을 보낸 수녀원의 수녀들에 영감을 얻은 리틀 블렉 드레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게도 치마길이가 무릎 아래에 위치하며 이는 지금까지도 '샤넬 라인'으로 불린다.

당시 프랑스에서 검은색은 남성에게만 허용된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색상이었고, 여성이 일상복으로 검정드레스를 착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파격이었다. 샤넬의 블랙 드레스는 출시 직후부터 극찬을 받으며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1926년 패션지 <보그>에서는 '리틀 블랙 드레스는 샤넬의 포드(대중적인 차량)'라고 비유하며 극찬하기도 했다. 오늘날도 블렉 드레스는 현대여성에게는 시크의 상징이자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우고 있며, 유명 디자이너들에 의하여 다양하게 오마주될 만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샤넬의 인기가 워낙 높아지다보니 미국에서는 그녀의 디자인을 흉내낸 값싼 모조품들이 범람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 하지만 샤넬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옷을 모방하는 것은 그만큼 패션철학을 인정받는 것이라면서 오히려 기뻐했다고 한다. 진품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실제로도 샤넬 스타일의 여성복들이 미국 여성들에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1930년대초에 이르면 샤넬은 전 세계 26개 매장과 2400여 명의 직원을 보유한 대형 사업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세상을 거머쥔 그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아서 카펠이 사망한 이휴, 샤넬은 러시아의 드미트리 대공, 영국의 왕족이던 웨스트민스터 공작 등과 교제했으나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샤넬은 이별의 상처를 잊기 위하여 더욱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1939년, 샤넬의 인생을 무너뜨리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독일에 의하여 함락당했다. 샤넬은 이 시기에 13살 연하의 독일 외교관 딩클라게와 연인 관계가 됐다. 많은 프랑스인들은 적국인 독일인과 사귀게 된 샤넬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심지어 샤넬은 2차대전 당시 나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당시 파리 경찰국에서 작성되어 2016년에 공개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샤넬이 딩클라게의 정보원으로 활동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샤넬은 영국 수상인 윈스턴 처칠 등 유럽 고위급 인사들과 두루 친분이 있었고, 샤넬의 조카가 독일 수용소에서 갑자기 풀려난 사실들을 근거로, 무수한 의혹이 쏟아졌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샤넬의 지워지지 않는 오점으로 남았다.

샤넬은 2차대전 이후 프랑스가 해방되면서 숙청위원회에 끌려갔지만 불과 몇 시간만에 풀려났다. 이는 샤넬과 친분이 있는 처칠과 웨스트민스터 공작 등의 고위층이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다. 샤넬은 1945년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여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로잔에서 한동안 은둔생활을 해야했다.

한편 샤넬의 공백기 동안 파리 패션계는 한동안 디올의 '뉴룩'과, 여성의 잘록함을 강조하는 코르셋의 부활 등, 불편하지만 화려하고 여성적인 패션으로 회귀하려는 복고 트렌드를 나타낸다. 샤넬은 이런 트렌드에 크게 분노했다고 하며 1954년 71살의 고령에 다시 파리 패션계 복귀를 선언한다.

샤넬의 15년 만의 복귀는, 나치 부역자 이미지가 남아있던 고국 프랑스에서는 냉대를 받았지만 미국에서는 극찬을 받았다. 미국 언론들은 "샤넬은 71세에 여전히 스타일 이상의 것을 가져다줬다. 그녀는 진정한 폭풍을 일으켰다"고 호평했다.

이 시기에 샤넬이 선보인 '트위드 정장'은 여성의 몸을 조이는 불편한 요소를 모두 배제하면서 활동성과 세련미를 강조하며 오늘날까지 샤넬의 또다른 대표작이자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다. 트위드 정장은 1950년대 활발한 사회진출을 이뤄낸 미국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일으키며 전 세계적인 붐으로 이어졌다. 또한 샤넬은 짧은 손잡이만 존재하던 상류층에 여성용 가방에 최초로 긴 끈을 달기 시작한 '샤넬백'을 최초로 창시하며 일흔의 나이에도 패션에 다시 한번 혁명을 일으켰다.

샤넬은 1957년 현대 패션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패션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운 '니먼 마커스상'을 수상했다. 여기서 샤넬은 "여성의 실루엣을 해방시킨 위대한 혁신가. 20세기 간편함이 여성복에도 반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았고 타인이 모방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고, 과거에 이룬 업적이 현재 패션에 엄청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고령의 나이에도 열정적인 활동을 이어가던 샤넬은 1971년 1월 10일, 향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1월 13일 프랑스에 열린 장례식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거장과의 작별을 애도했고, 샤넬의 모델들은 모두 검정 상복이 아닌 샤넬이 만든 옷을 입고 그녀를 추모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후에도 샤넬은 고향 땅에 묻히지는 못했다. 여전히 샤넬이 조국을 배신했다는 부정적인 의혹이 강했던 탓이다. 결국 샤넬은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스위스 로잔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녀의 행적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이제 역사의 몫으로 남겨졌다.

"패션은 가치관의 반영이며, 삶의 방식이고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샤넬의 패션에 대한 철학이자 인생관을 보여주는 어록이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파란만장한 20세기를 살았던 샤넬은, 여성의 자유가 억눌렸던 시대에 태어나 악착같이 자신의 꿈 너머로 나아갔던 개척자이자, '여성에게 자유를 입힌 디자이너', '패션의 역사를 바꾼 제왕'으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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