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루’ 경쟁 불붙은 도쿄…관광객 천국
경기 확장 국면 초입
서비스업 수요 폭발
현재 일본 경기가 확장 국면 초입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은 여럿이다. 무엇보다 일본 현지에서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서비스업 ‘펜트업(Pent-up Effect·억눌렸던 수요가 급속도로 살아나는 현상)’ 효과다. 도쿄 도심 곳곳에서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다. 일본관광청에 따르면, 올 1분기 관광·레저 목적 방일 외국인 여행 소비 단가는 18만6813엔(약 172만원)으로 코로나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보다 약 4% 증가했다. 단체 여행을 제한받는 중국인 관광객 유입이 주춤하지만 중국 외 지역에서 온 관광객이 지갑을 열면서 소비를 지탱한다. 덕분에 올 1분기 일본 국내총생산(GDP)은 전분기보다 0.4% 성장했다. 시장 예상(0.1%)을 뛰어넘었다. 이 추세가 1년간 이어진다고 가정해 산출하면 연율로는 1.6%다. 이 추세대로면 국제통화기금(IMF)이 1.5% 성장을 전망한 한국 경제성장률을 앞지른다. SMBC닛코증권에 따르면, 일본 상장 기업 1308곳의 2022 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4% 늘어 역대 최대를 기록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일본 증시도 뜨겁다. 도쿄증권거래소(TSE) 1부의 우량주로 구성된 니케이225지수는 최근 3만2000선을 오르내린다. 33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도쿄 증시 1부를 모두 반영한 토픽스(TOPIX)지수도 최근 30여년 만의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 기세에 불을 지핀 것은 도쿄증권거래소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 4월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이하 상장사에 “주가 상승 개선안을 적극 마련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무역 적자인데 기업 실적 개선
환산이익에 해외 법인 수익 덕
그러나, 일본 경제를 보노라면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대목도 적지 않다.
크게 보면, 일본은행 양적 완화에 따른 본원 통화 증가가 기대 인플레이션율 상승을 자극하고 이것이 엔저와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양적 완화가 수출, 투자, 소비 등의 증가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모호한 측면이 있다. 가령, 일본 무역수지는 만성 적자다. 지난해 일본은 사상 최대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 이익은 증가세를 보였다. 각 지표 간 상호관계를 보면 경기 상황을 일률적으로 진단하기에 모호한 대목이 적지 않다.
가장 논쟁적인 이슈는 엔저와 이익의 관계다. 수출 부진으로 무역수지가 만성 적자를 겪는데도 일본 기업 이익은 어떻게 증가했을까. 우선, 엔저와 수출 간 인과관계는 사실상 사라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현지 생산 거점 증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엔고 국면에서 일본 기업은 동남아 아세안(ASEAN) 벨트를 중심으로 글로벌 생산 기지를 확충했다. 현지 생산 거점 증가 자체는 무역수지를 개선시킬 수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일본은 후자 쪽이다. 일본의 해외 생산 기지 확대는 국내 생산을 대체해 수출이 감소하는 효과(수출 대체 효과)와 해외 법인이 생산한 부품을 수입하는 효과(역수입 효과)가 두드러졌다.
또 하나는 상당수 일본 기업이 엔저에도 불구하고 해외 시장에서 판매 가격을 낮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쿄대 경제학 박사 출신 이창민 한국외대 교수는 저서 ‘아베노믹스와 저온호황’에서 이렇게 진단한다. 이 교수는 “일본 기업은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 불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판매 가격을 안정화하려는 행동이 광범위하게 관찰됐다”고 설명한다. 당시 일본 기업은 엔화의 평가 절상에도 불구하고 현지 판매 가격을 올리지 않아 막대한 환차손을 기록했다. 회계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동결해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 교수는 “일본 기업은 환율 변화에 상관없이 현지 판매 가격을 안정화하려는 행태를 보여 환율 변동이 무역수지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구조”라고 진단한다. 정리하면, 엔저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은 달러 표시 수출 가격을 내리지 않았고 그 결과 엔화 환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환산손익(평가손익)을 수익으로 인식했다는 진단이다.
일본 기업 수익이 증가한 또 하나의 이유는 막대한 해외 자산이다. 일본은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면서도 경상수지는 대체로 흑자를 유지했다. 경상수지는 무역은 물론 해외 법인의 투자·배당 등 다양한 대외 거래를 종합 반영한다.
일본은 막대한 해외 자산 덕분에 1980년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특히, 일본 경상수지 흑자를 견인한 것은 소득수지 흑자다. 해외 직접 투자와 증권 투자 등에 따른 배당, 이자 수입 등의 1차 소득수지가 경상수지 흑자의 원천으로 지목된다. 한 예로, 일본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일본의 기업, 정부, 개인 등이 해외에 보유한 순자산은 357조엔이다. 이를 달러로 환산하면 3조1500억달러다. 이는 2020년 기준 영국의 GDP(IMF 기준 2조6400억달러)보다 많다.
디지털 전환 박차
피부로 느껴지는 호황의 단서는 엔저, 주가 상승, 기업 실적 개선, 고용 확대 등이다. 하지만 일본 경제가 구조적인 상승동력을 만들어내려면 물가와 임금 상승의 선순환을 달성해야 한다. 현시점에서 이 단계로 가기까지는 극복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 견해다.
일본 경제가 장기 불황에 빠진 원인을 되짚어보면 일본이 풀어야 할 숙제를 짐작할 수 있다. 학계와 현지 전문가 견해를 종합하면, 일본 장기 불황의 원인은 총수요보다는 총공급 부족으로 기우는 분위기다. 아베노믹스가 본격화한 이후 총수요는 몇 차례 회복 조짐이 보였지만 결국 장기 불황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기업의 해외 생산 기지 확대에 따른 파급 효과와 연관이 높다는 분석이다. 해외 생산 기지가 확대될수록 기업 입장에서는 국내 설비 투자를 늘려 생산성을 키울 유인이 떨어진다. 일본 국내 신규 투자 정체는 노동 생산성 둔화와 임금 정체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특히, 일본 경제는 거품이 무너지는 충격 속에서 ‘대차대조표 불황(밸런스시트 리세션)’에 시달렸다는 게 리처드 쿠 노무라경제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진단이었다. 대차대조표 불황이란, 일본 가계와 기업이 자산 가격 급락과 부채 급증으로 신규 투자를 늘리지 않고 부채 축소에 주력해 소비, 투자가 위축되고 과잉 저축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양적 완화로 본원 통화를 아무리 늘려도 신규 투자가 늘지 않는다면, 통화 승수가 작아 금융 정책이 효과를 내기 힘들다. 일본 정부가 2021년 ‘디지털청’을 설립하고 범정부적으로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내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결국 금융과 실물 경제의 연결고리를 탄탄히 할 설비 투자를 확대할 동력은 디지털 전환 등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개선에 달렸다는 진단이다.
(도쿄·구마모토 = 배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19호 (2023.07.26~2023.08.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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