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뿐이던 이들, 악기 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김호정 2023. 8. 2.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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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대관령음악제에 출연한 우크라이나 연주자들
양성원 예술감독이 전하는 이들의 이야기
"온통 비극적 이야기 뿐이었지만 무대 위 집중력과 완성도 놀라워"
우크라이나의 연주 단체인 키이우 비르투오지. 지난달 말 평창대관령음악제의 무대에 섰다. [사진 평창대관령음악제]

지난달 29일 강원도 평창의 알펜시아 콘서트홀. 26일 개막한 평창대관령음악제 중 하나인 이날 공연에서 ‘엘 말레 라하밈(El Maleh Rachamim)’이라는 곡이 앙코르로 연주됐다. 이스라엘 작곡가 바루크 벌리너의 이 음악은 ‘자비가 충만한 하나님’이라는 제목이며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린다. 현악기의 불안한 기도처럼 시작한 음악은 첼로의 독백과 현악 합주를 오가며 비극적으로 이어졌다. 이 곡을 연주한 현악 앙상블은 키이우 비르투오지. 우크라이나의 수도에서 2016년 창단된 팀이다.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예술감독을 올해부터 맡은 첼리스트 양성원은 “예술감독을 맡자마자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이들을 평창에 초청했다”고 했다. “음악 축제는 보여줘야 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들과 함께 하는 무대라면 평화와 화합이라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키이우 비르투오지는 27일과 29일 한국의 음악가들과 함께 알펜시아 콘서트홀 무대에 섰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ㆍ박지윤과 비발디 ‘사계’를, 소프라노 서예리와 베르크ㆍ말러의 가곡 등을 들려줬다.

공연이 끝난 후 양성원 감독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전쟁에 대한 메시지를 생각하며 섭외 했지만 무대 위에서는 음악 그 자체만이 보였다”며 “그만큼 실력과 진정성에서 높은 수준에 있는 앙상블”이라고 말했다. “키이우 단원들과 대화해보면 비극적 이야기 뿐이다. 주변의 사람들, 그것도 아주 젊은 사람들을 전쟁 중에 잃었을 뿐 아니라 가족들은 서로 흩어졌다.” 이번에 평창을 찾은 단원은 19명이다.

양 감독은 그 이야기의 비극성과 무대 위의 완성도를 대비해 짚어냈다. “무대 뒤에서 대화할 때 그들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 악기를 집고 음악을 시작하는 그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됐다. 비발디의 음악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했다.” 그는 이런 과정 중에 우크라이나와 한국 음악가들이 서로의 소리를 듣고 서로에게 맞추기 위해 애쓰던 장면을 포착했다. “키이우 비르투오지는 ‘특별히 잘 맞추는’ 팀이었다. 서로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한국 연주자들과 어떻게든 맞춰주기 위해 조절하고 대화하는 모습이야말로 음악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적절한 장면이었다고 본다.” 그는 또 "호로비츠, 오이스트라흐, 길렐스와 같은 뛰어난 연주자들이 우크라이나 태생이었다. 그 자부심과 전통을 이번에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25일 강원도 고성의 DMZ 박물관에서 공연한 키이우 비르투오지. [사진 평창대관령음악제]


키이우 비르투오지는 러시아 태생의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드미트리 야블론스키가 창단했다. 창단 후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이스라엘ㆍ스페인ㆍ스위스 등에서 한 해 120회 연주했던 팀이다. 전쟁 발발 이후에는 이탈리아 키에티로 본거지를 옮겨 활동하고 있다. 양 감독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의 음악을 통한 화합을 보여준다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연주력 때문에도 초청을 많이 받는 팀”이라고 했다.

이들은 본 공연에 앞서 지난달 25일 고성 DMZ 박물관에서도 30여분 동안 연주했다. 29일의 앙코르곡 ‘엘 말레 라하밈’을 포함했다. 양 감독은 “상징적인 곳에서 한 연주를 영상으로 꼭 남겨달라 부탁하더라. 세계에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알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고 전했다.

올해로 20회째인 평창대관령음악제는 5일까지 계속된다. “폐막 공연도 상징적이다. 한국의 최하영과 일본의 미치아키 우에노가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을 나눠 연주한다. 일본과 한국의 젊은이가 음악을 함께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평화의 메시지가 수준 높은 음악에 자연스럽게 포함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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