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으로 작품의 퍼즐 맞추려 해" 주지훈의 연기론
[이선필 기자]
▲ 영화 <비공식작전>에서 레바논 현지 택시기사 판수를 연기한 배우 주지훈. |
ⓒ (주)쇼박스 |
성인이 된 후 가장 오래 한국을 떠나 있었다지만, 그 어떤 현장보다 마음이 건강했다고 한다. 1986년 레바논에서 발생한 한국 외교관 피랍 사건을 극화한 영화 <비공식작전>에서 그는 현지 택시기사 판수 역을 맡았다. 영화 안에서 판수는 중동 지역 전문가인 외교부 직원 민준(하정우)과 함께 납치된 외교관을 구하는 데 극적 긴장감을 더한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주지훈의 판수는 해외 어디엔가 존재할 것만 같은 현실감이 있다. 배우 주지훈의 숙제는 바로 그런 현실감을 구현하면서 동시에 이야기의 재미를 배가하는 캐릭터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1일 서울 삼청동 인근 카페에서 만난 주지훈은 "캐릭터의 자유도가 높았다"며 영화 이야기를 풀어냈다.
모로코 현지의 기억
"대사에도 일부 나오지만 판수는 월남전에 다녀오고 한국에서 여러 일을 겪은 인물로 봤다. 1980년대 중동 붐이 있었잖나. 외화를 벌기 위해 흘러가다가 레바논에 정착한 것이다. 지금도 그곳에선 동양인을 찾기 힘들다고 하더라. 살기 위해 판수는 그곳에서도 좀 튀는 외형을 택했을 것이고, 체격도 키웠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배우 입장에선 판수를 예민하고 걱정이 많아 마른 인물로 해석해도 되고, 그 반대로 해석해도 되는 캐릭터였다. 감독님과 의상팀과 상의하면서 인물을 만들어갔다.
영화를 보면 현지 사람 중 유일하게 판수만 모자를 쓰고 있다. 절실하니까 그런 거다. 한국으로 치면 외국인이 삼청동 천통찻집 앞에서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판소리 하며 호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감독님과는 판수가 월남전 참전 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겼고,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해 의도치 않게 고국에서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준 뒤 도망 나온 인물로 얘기했다. 그 외엔 실제로 현지 로케이션 촬영에서 직접 느낀 대로 해보자였다. 3개월 넘게 외국에서 사는 게 저도 처음이니까."
<비공식작전>의 로케이션 장소는 아프리카 문화권 중 가장 안전하게 촬영이 가능하면서도 협조적인 모로코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촬영이 1년여 미뤄졌고, 미리 배편으로 보내뒀던 각종 생필품 중 일부가 분실되는 일이 있었지만 주지훈은 가장 규칙적이고 심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했다며 당시 현지 분위기와 일화를 전했다. 배우 하정우와 함께 요리 애호가로 알려진 그는 제작진과 현지 스태프에게 식사를 만들어 제공하는 등 능동적인 현지 생활을 했다. 오랜 친분이 있는 하정우, <킹덤> 시리즈로 이미 호흡을 맞춘 김성훈 감독과 그 어떤 현장보다도 즐거운 촬영했다고 그는 전했다.
"확실히 전우애가 생기더라. 집을 3개월 이상 비운 적이 없어서 굉장한 두려움을 안고 떠났다. 근데 촬영과 휴식, 운동으로 정해진 루틴을 소화하면서 정서적으로 행복해지더라. 성인이 되고 처음 느껴보는 안정감이었다. 촬영이 없는 날엔 새벽 5시에 일어나 음식을 하고, 각자 쉬다가 같이 외식을 하든 산책을 한 뒤 운동을 했다. 그러다 저녁 재료를 손질하고 그랬지. 난 장조림, 튀김류를 정우형은 젓갈류를 미리 준비해서 갔다. 음식 조리도 서로 역할을 나눠서 했고.
▲ 영화 <비공식작전> 스틸컷 |
ⓒ ㈜쇼박스 |
동료와 작품을 애정하는 마음
이미 친숙한 이들과 함께 한 해외 촬영은 분명 주지훈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 보였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도 함께 출연한 적 있는 하정우와는 서로 눈빛만 봐도 연기 수위 조절이 될 정도라고. 주지훈은 김성훈 감독과 하정우와의 기억 일부를 전했다.
"개인 친분이 있다 해도 일은 또 다를 수 있잖나. 연기 스타일이 정우형과는 정말 잘 맞는다. 대본을 보고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은 부분은 고민하게 되는데 정우형이 있으니 그런 생각이 안 들더라. 현장에서 서로의 표현 방식에 맞게 조율될 테니 말이다. 감독님이 가끔 한번 더 다시 찍자고 할 때 둘 다 표정만으로도 서로 뭘 원하는지 아는 때도 있었다.
감독님은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사석에서 뵌 적이 있다. 그 힘든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도 놓치지 않을 수 있는지, 배우나 스태프들의 원망 어린 시선이 있어도 어떻게 그리 꼼꼼하게 가시는지 물어봤다. 이게 조심스럽기도, 뻔한 말일 수도 있는데 감독님이 실제로 자녀 둘이 있다. 정말 영화가 당신 아이 같다고 하시더라. 그게 진심이라는 게 딱 느껴졌다. 이런 분이니 어떤 요구를 해도 싫지 않지. <킹덤> 때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했지만, 감독님과 함께 하는 현장은 뭐가 힘들었는지 일부러 떠올려야 할 정도다."
그렇기에 모로코 탕헤르, 카사블랑카, 마라케시를 돌며 약 1개월간 공들인 카체이싱 장면을 만들어갈 때도 몸은 고될지언정 마음은 즐거웠다고 한다.
"서로 의견이 다를 땐 신뢰를 바탕으로 눈치를 본다(웃음). 결이 좀 다른데 툭 해보면, 반응이 오잖나. 아닌 것 같으면 상대방 생각대로 또 해보는 거지. 뭔가 마음에 안들면 다시 해보겠다고 말할 수 있는 편함이 있다. 그러다 기발한 해석이 많이 나오기도 했다. 나이가 많다고 앉혀놓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여유롭게 대처하신다. 이런 게 경험이구나 싶지.
카체이싱은 정말 제작진의 노고가 들어간 결과다. 세 도시에서 20회 차 가까이 찍은 것 같은데 장소 섭외나 액션 디자인 등 사전 작업이 얼마나 정교했겠나. 그리고 정우 형에게 참 미안했다. 제가 운전하잖나. 원래 모든 탈 것은 운전대를 잡지 않는 동승자 입장에선 공포감이 커지거든. 안 그래도 안전을 추구하는 분이신데, 제가 드리프트 할 때마다 형이 입술을 앙 다문 모습을 봤다."
"멜로 연기 꼭 하고 싶어"
주지훈은 감독과 배우의 관계를 집 계약에 비유했다. "영화는 분명 감독의 예술인 게 맞다"며 그는 "배우 입장에서 감독의 요구가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인정할 부분은 해야 한다. 그래서 최근 들어 더욱 감독님, 작가님과 이야기를 많이 하려 한다"고 말했다.
"감독님은 집주인이고 배우는 세입자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배우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때가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작품의 세계는 배우가 창조한 게 아니니까. 기획 의도와 다른 연기를 하면 혼자 튀게 된다. 배우는 자기 캐릭터를 보는 사람에게 받아들이게끔 표현하면 된다. 그렇기에 집주인을 만나서 집 인테리어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사전에 만나서 알아보고 협의하려 하는 거지. 제 캐릭터 하나로 작품 전체를 바꿀 수는 없다. 그래서 배우들이 캐릭터 이름이 제목인 작품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건 캐릭터가 곧 작품 전체니까.
작품을 대하는 태도나 해석이 같아도 감독님이 다르다면 같은 연기를 할 수 없다. 배우들이 헷갈려 하는데 자기 연기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저도 제 진심과 작품 사이의 퍼즐을 어떻게 맞출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보다 감독님과 작가님을 자주 만나는 것 같다. 드라마 <지리산> 때도 촬영 전에 김은희 작가님과 제작사 대표님과 함께 지리산을 3박 4일로 다녀왔다. 어느 곳을 보며 이야기를 떠올렸나 얘기도 듣고, 함께 맥주도 마시며 길게 얘기한 기억이 있다."
인터뷰 말미 멜로 영화 출연을 묻는 기자 말에 그는 "드라마 <하이에나> 이후 멜로영화를 묻는 분이 꾸준히 계시는데 정말로 하고 싶지만, 투자가 잘 안된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당장 이제 막 개봉한 <비공식작전>에서도 그는 "다른 대작 영화들과 경쟁하는 게 쫄리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 친한분들이고 한국영화가 힘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에 전부 잘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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