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화주의(三和主義)' 구상하며 청국행 준비

김삼웅 2023. 8. 2. 07:24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도쿄에 돌아와서는 어느 정도 감시가 느슨해졌다.

진원지는 일본의 침략주의 사조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어서이다.

조선·중국·일본 세 나라가 대외관계에서 평화를 유지하며 서로 연합하여 구미열강의 식민주의를 반대하며 각각 자기나라의 독립을 고수하면서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입론이다.

'삼화주의'가 빛을 발휘해서 동양이 전쟁터가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직은 입론(立論) 수준일 뿐 현실은 거꾸로였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 30] 청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동양평화를 유지하고자 행동에 나섰다

[김삼웅 기자]

 일본 망명 당시의 김옥균.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도쿄에 돌아와서는 어느 정도 감시가 느슨해졌다. 각계 인사들과도 만날 수 있고 신문·잡지도 접하게 되었다. 동북아 정세가 크게 우려되었다. 진원지는 일본의 침략주의 사조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어서이다. 

김옥균은 '삼화주의(三和主義)'를 구상하였다. 조선·중국·일본 세 나라가 대외관계에서 평화를 유지하며 서로 연합하여 구미열강의 식민주의를 반대하며 각각 자기나라의 독립을 고수하면서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입론이다. 아시아 국가들이 주체적으로 발전하고 연대하여 서양세력에 대항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이홍장 등 실력자들을 만나 담판하겠다는 구상을 하였다.   

김옥균은 일본 망명 초기부터 중국 사람들과도 일정한 교제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홍장의 아들인 이경방(李經芳)이 주일공사로 도쿄에 와 있을 때 김옥균은 그와 접근하여 교제관계를 맺었고 후에 이경방은 신임공사 왕봉조(汪鳳藻), 공사관 관원인 유경분(劉慶汾)으로 하여금 김옥균의 거처를 종종 방문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후 이경방의 명의로 김옥균을 청국에 초청하는 편지를 유경분을 통하여 김옥균에게 전달한 일도 있었다. 김옥균은 청국에로의 출발을 앞두고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서도 일정한 고려를 하였다. (주석 1)

망명객의 신분으로 일본 조야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청일전쟁이 머지않았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부국강병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자부한 일본은 이참에 청국을 침략하여 대륙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준비 중이었다. '삼화주의'가 빛을 발휘해서 동양이 전쟁터가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직은 입론(立論) 수준일 뿐 현실은 거꾸로였다. 

생각을 거듭하면서 결국 중국으로 떠나기로 작심하였다. 이를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붙잡을 수 없다"고 설득하였다.

이처럼 김옥균은 중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으나 그에게는 청국으로 떠날 여비와 그곳에 가서 당분간 활동하여야 할 비용조차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김옥균은 하는 수 없이 딱한 사정을 도야마에게 말하고 약간의 금전을 마련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도야마는 자기가 경영하는 모(某) 광산에서 얼마간의 돈을 변통해 주기로 승낙하고 오사카에서 현금을 조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김옥균은 여비문제가 해결될 것을 기대하고 그가 오가사하라도에서 알게 되었으며 그를 어려서부터 몹시 따르던 일본인 청년 와다(和田延次郞)를 데리고 1894년 2월 4일 도쿄를 출발하였다. (주석 2)

김옥균은 일본의 이중심보를 꿰면서, 10년 전 자신이 적대시했던 청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계산이 섰고, 이제 행동에 나섰다. 

김옥균의 이같은 인식과 관련 예리한 비판이 따른다.

청불전쟁이나 청일전쟁 등의 대국(大局)에 관한 김옥균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으나, 쿠데타시 청국의 간섭이나 일본군의 행동 등 소국(小局)에 관한 예측은 빗나갔던 것이다. 말하자면 큰 것을 보는 대관(大觀)은 하였으되, 작은 것을 살피는 소찰(小察)을 그르쳤다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이는 김옥균의 성품상의 결함, 곧 대담성이 지나쳐 신중치 못한 성품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상하이행에 홍종우를 한편으로는 의심하면서도 동행하게 한 것도 바로 이같은 성품상의 결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김옥균의 이같은 성품상의 결함, 곧 대담성이 지나쳐 신중치 못함이 갑신정변 실패의 큰 원인이 되고, 자신의 목숨마저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주석 3)

주석
1> 앞의 책, 210쪽.
2> 앞의 책, 212쪽.
3> 김영작, <김옥균 - 시대를 앞질러간 개혁의지>, <한국사시민강좌(제31권)>, 97쪽, 일조각, 2002.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