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전 '현모양처 전공' 그대로…日여대, 신입생 절벽에 무너졌다

이유정, 문상혁 2023. 8. 2.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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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일본 와세다대의 무라카미 하루키 국제도서관에 한 여학생이 지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일본 명문 사립 와세다대에 재학 중인 데라지마 구루미(寺嶋来実·22, 문화구상학 3년)는 한국 미디어 업계에 취업을 희망해 한국에서 유학 중이다. 앞서 네 살 터울인 언니는 일본의 이름난 여대를 다녔는데, 그는 미디어학을 전공할 수 있는 와세다대를 선택했다.

지난달 17일 비영리단체(NGO) 아시아희망캠프기구의 서울 사무실에서 만난 데라지마는 “나한테는 전공이 매우 중요했는데, 여대는 미디어학 전공이 있는 곳이 많지 않아 남녀공학 대학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가 재학 중인 와세다대는 일본에서 니혼대(약 2만 명)에 이어 두 번째로 재학 중인 여학생 많은 곳으로 꼽힌다. 2021년 기준 여자 재학생은 1만 4000여명으로, 전체 학생 대비 37%를 차지했다.

저출산을 맞닥뜨린 일본의 대학들이 ‘신입생 모집 절벽’을 맞고 있는 가운데 여대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여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은 나날이 늘어가는데 여대들이 시대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면서 저출산의 타격을 가장 먼저 맞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 아사히·요미우리 신문 등은 이 같은 ‘여대의 위기’를 잇따라 조명하고 있다.

24일 아사히에 따르면 일본엔 현재 모두 73곳의 여대가 있다. 1998년 총 98곳에서 한 세대 만에 25곳이 폐교했거나 공학으로 전환했다. 특히 사립 여대의 상황이 심각하다. 요미우리가 국립 오차노미즈여대(오차대)·나라여대 두 곳을 제외한 사립 여대를 조사한 결과, 전체의 69%가 지난해 모집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총 71곳 가운데 49곳이 미달이었고, 모집 정원의 절반도 못 채워 폐교 수순인 학교도 3곳 있었다.

지난 4월 일본 고베시의 고베 가이세이여대는 “내년도부터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고, 오는 2027년 3월 폐교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1965년 개교한 이 학교는 전교생 380명의 소규모 대학으로, 취업에 유리한 영어관광학과가 있어 학생들이 꾸준히 몰렸다. 그러나 코로나19를 기점으로 관광 산업이 위축되자 덩달아 신입생도 줄었다. 올해 총 모집 정원 95명 중 24명만 지원하면서 폐교를 결정했다.

올해 6월 도쿄의 한 교차로에서 시민들이 유모차를 밀고 가고 있다. 일본에서 지난해 태어난 신생아 수는 1889년 이후 처음으로 80만 명 아래로 내려갔다. EPA=연합뉴스


앞서 지난 3월엔 도쿄도 다마시의 게이센여대가 신입생 모집 중단을 발표했다. 게이센여대의 히노 오키오(樋野興夫) 이사장은 아사히에 “대학 졸업 후에 일하는 여성이 늘면서 취직과 이후의 경력 관리에 공학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여학생들이 많아졌다”고 밝혔다.

일본은 인구 구조 변화의 '경고등'이 일찍 켜졌으나 보수적인 교육계가 제때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일본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18세 인구는 1992년도에 205만명으로 정점을 찍고 줄곧 감소했다. 지난해 40% 감소한 112만명이었고, 장차 18년 뒤엔 70만 명대로 떨어질 전망이다. 지난해 태어난 신생아 수가 79만 9700명(합계 출산율 1.26명)에 그쳤기 때문이다.

이처럼 학령 인구가 줄고 있었지만, 대학 진학자 수는 최근까지 꾸준히 늘었기 때문에 대학들은 위기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1995년 22.9%에서 지난해 53.4%로 두 배 넘게 성장하며 신입생 수 증가를 견인했다.


“법대 둔 여대 찾아보기 어려워”


지난해 11월 일본 도쿄의 한 중학교에서 여학생들이 체육 수업을 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일본 언론들은 상당수 여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설립된 당시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70년 전 여성상을 반영해 가정에서 도움이 되는 인문 교양, 생활과학과 관련한 전공을 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다. 일본 여대 가운데 법대나 상경계열, 의과대를 둔 곳은 손에 꼽힐 만큼 적다. 왕위 계승 서열 1위 후미히토 왕세제의 배우자 키코 비가 박사 과정을 밟아 유명한 오차대(1949년 설립)도 문교육학·이학·생활과학 3개 단과대만을 두고 있다.

저출산 등으로 남고·여고가 공학으로 통합되면서, 학생들이 대학도 남녀공학에 진학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됐다는 분석도 있었다. 익명을 요청한 20세 일본 여대생은 중앙일보에 “솔직히 대학에 가서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에 여대를 선택하지 않았던 점도 있다”고 털어놨다.

일부 여대는 전공을 신설하거나, 아예 공학으로 전환해 활로를 찾으려 노력 중이다. 고베의 신와여대는 작년 공학(고베신와대)으로 전환한 이후, 올해 정원(385명)을 초과한 467명이 입학했다. 교토여대는 2023년도에 데이터 사이언스 학부를 신설했다. 오차대·나라여대는 2020학년도부터 트랜스젠더 등 성 소수자들에게도 입학을 허가했다.

일본 매체들은 지방대도 학생 충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사라진다'는 한국의 '지방대 소멸' 위기와 닮았다. 지난해 일본 사립대들의 전체 정원 미달률(47.5%)은 1999년 통계 작성 이후 최고를 기록했는데, 주로 지방 사립대들 때문이었다. 도쿄도의 릿쿄대에 재학 중인 나카가와 렌토(中川 連人·23, 생물학 3년)는 중앙일보에 “지방으로 간다면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만 고려했다”면서 “자취 비용 등 이것저것 따져보니 학비가 비싸더라도 수도권 사립대에서 통학하자는 결론이 나왔다”고 말했다.

다만 일본은 한국만큼 ‘서울 쏠림’ 현상이 심하지 않다고 한다. 구마모토현립대에 재학 중인 한 익명의 대학생은 “내 주변에는 고향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 하는 친구들이 많다”며 “지방이라도 국립대는 여전히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대만 “단교한 온두라스 학생도 장학금”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이 지난 6월 대만의 국립 국방대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생들의 경례를 받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저출산으로 인한 대학 통폐합 문제가 과제로 떠오른 건 한국(출산율 0.78명), 대만(0.89명)도 마찬가지다. 대만은 2010년부터 10곳 넘는 대학이 통폐합됐다. 교육 당국에 따르면 대만 대학의 올해 신입생은 19만 1000명이었다. 대학 신입생이 20만 명 아래로 떨어진 건 대만 역사상 처음이었다.

올해도 국립 대만과학기술대학이 사립인 화샤(華夏)과학기술대를 흡수하는 방안이 승인됐다. 화샤과기대는 올해 신입생 정원의 43%밖에 채우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다. 대만 당국은 작년부터 장학금을 줘가며 해외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붙잡고 있다. 대만 자유시보에 따르면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이달 “졸업 후 대만에 남기로 서약한 유학생 1만 명에게 4년 동안 장학금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국립대만대는 지난 3월 대만과 단교, 중국과 수교한 온두라스 유학생 약 200여명에게도 “장학금을 계속 지급할 테니 학교에 남아달라”고 설득했다.

대만은 ‘저출산→대학 부실화→전략 산업의 인재풀 부족’의 연쇄 반응이 일어난 전형적인 사례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저출산으로 인한 대만의 인구 통계학적 위기는 대만의 반도체 업계의 엔지니어 등 숙련 노동자 부족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류더인 TSMC 회장도 “대만 반도체 산업의 가장 큰 위기는 인재 부족”이라고 우려했다.


‘출산율 0.78’ 韓, 23년간 부실대 19곳 퇴출…日보다 느려


지난 2021년 지방대학 위기 타개를 위한 부산·울산·경남 지역 기자회견이 부산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송봉근 기자
한국에도 대학 구조조정은 20년 넘게 고민해 온 과제다. 매년 교육부는 재정지원제한 대학을 지정하고 있다. 정부 지원 학자금 대출 등을 제한하는 것으로 부실 대학이 정리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폐교로 이어진 곳은 2000년 이후 23년 동안 19곳에 불과했다. 일본에선 같은 숫자의 학교가 최근 10년 새 문을 닫은 것과 비하면 속도가 더딘 편이다.

올해 5월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주최한 대학 구조조정에 관한 정책포럼에선 “일본 사례를 참고해 대학들의 자발적인 폐교와 통폐합을 촉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포럼에 참석한 김성기 협성대 교육학과 교수는 “주변국 사례에서 보듯 저출산으로 인한 대학의 위기는 대학 자체의 문제로만 접근하면 해결할 수 없다”면서 “단순히 외국인 유학생 유치뿐 아니라, 정부가 전체 인구 관리 차원에서 외국인 친화 정책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고민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유정·문상혁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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