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경외심을 가르치는 교육

2023. 8. 2.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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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부모님과 떨어져 객지에 나와 살고 있던 나를 늘 세심하게 보살펴주셨다. 종종 어려운 일은 없는지 물으며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서슴지 말고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 선생님은 종례 후에 나만 잠시 교실에 남아 있으라 하셨다. 친구들이 다 귀가한 후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며 선생님을 기다렸다. 잠시 후 교실로 돌아오신 선생님은 칠판 앞에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를 배치한 후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시더니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네시며 말씀하셨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춘원 이광수의 대화 내용을 각색한 것인데, 내일 수업 시간에 너와 내가 함께 역할극을 하면 해서….” 크나큰 배려였다.

그 세세한 내용을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도산이 우국충정의 열망에 사로잡힌 춘원을 격려하는 내용이었다. 도산은 모름지기 새 나라를 만들려는 이들은 정직해야 한다며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기 마련이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온다’고 말했다. 선생님과 대사를 주고받던 그 날, 내 가슴에는 기둥 하나가 들어섰다. 모호함 속에서 흔들리며 살았지만, 지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이 내 속에 심어주신 그 든든한 기둥 덕분이었다. 잊지 못할 추억 하나가 어둑한 삶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동서양 철학을 회통하며 성서의 심오한 의미를 풀어주던 김흥호 목사님은 스승을 가리켜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자꾸 자라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스승은 삶에 대한 뚜렷한 자세를 가진 사람이요, 자기를 이긴 사람이요, 스스로 산이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산이 있으면 사람은 혼자 올라갑니다. 그 존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저절로 남을 오르게 합니다.” 있음 그 자체로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 스승이다. 스승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바라보고 본으로 삼아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할 때 삶은 빈곤해진다.

배움의 시작은 바라봄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주의 깊은 살핌 속에서 지혜가 싹튼다. 요한은 성도들에게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십시오”라고 권고했고,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라고 말했다. 자칫 오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자아를 세상의 중심에 두려는 욕구를 철저히 비워낸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경외심에 가득 찬 바라봄은 닮음의 욕구로 이어진다.

배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존중하는 마음이다.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교육 현장은 붕괴된다. 교육 현장은 필요한 정보를 사고파는 시장이어서는 안 된다. 교육이 참 사람됨을 지향한다면 말이다. 학생이 교사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가십성 기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더니 급기야는 학부모로부터 지속적인 악성 민원에 시달리던 초등학교 교사가 세상을 등지는 일이 벌어졌다.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그릇된 사고가 빚어낸 참극이다. 경쟁력은 있지만, 타인에 대한 존중을 배우지 못한 이들이 만들어갈 사회는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책임을 져야 할 당국자들은 교권 추락의 주범이 학생 인권 조례라는 엉터리 진단을 내리거나, 학부모와 교사의 갈등으로 몰아가려 한다. 무책임한 책임 회피다. 지금은 광장으로 나온 교사들의 외침을 겸허하게 경청해야 할 때다. 교육 당국과 학부모 그리고 학생들이 서로를 깊이 신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진력해야 한다.

마종하 시인의 ‘딸을 위한 시’가 떠오른다.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 온 아이가 누구인가를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세상에 가득 찬 생명의 신비에 경탄하고, 타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마음으로 사는 이들이 늘어날 때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경외심을 가르치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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