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통일부의 것은 통일부에게
미군 사병 월북 사건이 다소 엉뚱하게도 미·북 대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북한이 대남·대미 접촉을 끊은 지 4년이 되다 보니 이번 계기에 이루어질 접촉에 대한 기대가 커져서 그럴 터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세간의 기대보다 북한의 대외 접촉 의지나 수순일 것이다.
북한의 의중을 헤아리려면 북한이 처한 상황과 관련 조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지금 대외적으로 도발 모드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고질적인 경제난에다 코로나에 따른 봉쇄의 악영향이 가중되어 민생이 어렵다. 전략적으로는 핵과 미사일 개발을 더 과시한 후 협상 모드로 전환하는 수순을 생각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악화한 민생을 위해 외부와 교류하고 지원을 확보할 필요도 커지는 상황이다. 물론 북한은 표면적으로 대화에 냉담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내막을 보면 틈새가 관찰된다. 무엇보다도 근래에 일·북 사이에 무언가 접촉 조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북한이 코로나로 봉쇄했던 국경을 열면 일·북 간의 접촉이 가시화할 소지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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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 소용돌이에 놓인 통일부
대북 위상 더 낮아질까 우려돼
정보기관과 업무 영역 정리해
본연의 기능과 역할 찾게 해야
」
북한은 소위 ‘7·27 전승절’에 중·러의 축하 사절단을 접수했다. 코로나 이래 최초의 외빈 접수다. 북한이 국경봉쇄를 푸는 전기가 될지 주목된다. 북한이 9월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할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상황과 조짐은 조금씩이나마 북한이 대외접촉을 늘리는 추세라는 걸 보여준다. 이런 배경 하에서 미군 사병의 월북사건이 발생했으므로 이번 미·북 접촉이 북한의 대화 거부 자세에 완화제로 기능할지 주시할 가치는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런 추세 속에서 전개될 남북관계 모습이다. 아마도 북한은 미·일과 접촉하더라도, 한국과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정부도 북한과의 대화에 별 미련이 없을 수 있다. 근래 정부의 대북정책과 대외정책이 더욱 이념과 가치에 경도되고 있으므로 그렇게 예상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일·북이 협상하고 미·북이 대화하는 국면에서 남북이 대결 일변도라면 한반도 문제 논의에서 한국만 배제되므로 우리 외교 입지에 좋을 것은 없다. 강성 대북 입장을 가진 정부로서는 내심 미·일의 대북 접촉을 막고 싶을 수도 있겠으나, 미·일이 우리 뜻을 따라주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은 정부 내에서 우리도 북한과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견해가 세를 얻을 것이다. 이런 경로는 과거 보수정부 때에 흔히 보던 대응 패턴이었다.
그렇다면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는 일에 누가 나서겠는가? 통일부가 하겠는가? 많은 사람은 그 일은 국정원이 할 것으로 예상한다. 남북관계의 주요사안은 모두 정보기관이 직접 나서서 북한과 협상해 온 것이 군사정권 이래 오랜 관행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통일부는 그동안 대북 지원부 행태를 보였다는 이유로 강도 높은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통일부의 대화, 교류, 협력 부분이 징벌적 조치를 받을 전망이다. 통일부의 남북접촉 기능은 위축될 것이고, 통일부의 위상과 입지도 낮아질 것이다. 통일부가 남북대화에서 주 역할을 할 가능성은 더 줄어들 것이다. 자연히 정보기관이 통일부의 기능 일부를 맡아서 하는 관행은 더 굳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그동안 이런 관행은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을 이유로 정당화되었으나, 그 결과로 통일부의 기능은 왜곡된 바 있다. 통일부가 남북관계 전반을 책임성 있게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도 이런 통일부의 처지를 알고서 통일부를 중시하지 않았다. 자연히 남북협상도 왜곡되었다. 이런 관행이 정보기관에 득이 된 것도 아니다. 정보기관의 기능도 왜곡을 겪었다. 북한 정보를 다루는 정보기관이 직접 북한과 협상에 나선 셈이니 안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선진 정보의 세계에서는 상대를 정탐하는 부서가 그 상대와 협상에 나서는 것은 금기다.
G7의 반열에 든 한국에서 이런 비정상이 장기화하는 것은 통일부는 물론 정보기관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통일부의 ‘개혁’이 제기되었으니, 차제에 통일부와 정보기관 간의 이런 관계를 그대로 둘지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통일부가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보기관과의 업무영역을 정리하여 통일부를 정상화하고, 그 전제 위에서 인원과 조직을 정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과 대화를 하든 대립을 하든 명실공히 남북관계의 주무부서는 통일부가 되어야 한다. 여타 부처는 통일부가 남북관계를 잘 다루도록 정보를 주고 협력하고 지원해야 한다.
통일부의 권능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는 놔두고 다른 문제만 따지면, 사안을 부분적으로만 다루는 셈이 된다. 이참에 통일부의 것은 통일부에게 주고, 개혁이든 개편이든 하는 것이 좋겠다. 그것이 순리이다. 그러면 통일부, 국정원, 남북관계 모두에게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국내외의 여론도 이를 오랜 비정상의 정상화이자 선진화 조치로 볼 것이다.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 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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