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철의 시시각각] 선택적 정보 공개와 거짓말 사이
‘들은 것을 들은 것을 들었다는 식의 떠도는 풍문’.
지난 2월 대통령실은 관저 이전에 역술인 천공이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 이렇게 규정했다. 이 의혹을 자신의 저서를 통해 제기한 부승찬 전 국방부 대변인과 이를 최초 보도한 두 매체의 기자들을 고발했다는 내용을 담은 알림 문자를 통해서다.
통상 기자들은 전언(傳言)을 곧바로 기사화하는 걸 꺼린다. 전달 과정에서 진의가 왜곡될 수 있고, 때론 전달자가 지어내고선 ‘들은 얘기’라고 꾸밀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전언의 전언의 전언’은 거짓말과 동급이다. 추가 확인 없이 쓰는 것은 금물이다.
대통령실도 이 점을 지적했다. “이런 중대한 의혹을 제기하려면, 최소한 천공의 동선이 직간접적으로 확인되거나 관저 출입을 목격한 증인이나 영상 등 객관적 근거라도 있어야 한다”고 고발 사유를 밝혔다.
경찰, 관저 주변 CCTV 분석…영화 2000편 분량
경찰은 지난해 3월 해당 장소 인근의 CCTV를 싹 다 뒤졌다고 한다. 4TB(테라바이트), 영화 2000편 분량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막노동이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지난 4월 11일 경찰 고위 관계자는 “영상에 천공은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기자들은 궁금한 게 더 많았지만, 경찰은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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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에 천공 아닌 백재권 등장
의문은 석 달이 지나 풀렸다. 경찰이 확인한 CCTV에 천공이 아닌 백재권 사이버한국외국어대 겸임교수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그는 풍수전문가 겸 관상가다. 과거 윤석열 대통령은 악어상, 김건희 여사는 백공작상이라는 동물 관상을 내놔 주목받은 인물이다.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곳에 백씨는 당시 관저 이전 TF팀장이던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과 부팀장이던 김용현 경호처장과 동행했다. 부사관이 전한 정황은 같은데, 역술가만 풍수전문가로 대체된 것이다. 이제 쟁점은 역술가와 풍수전문가의 차이가 처벌할 만큼 중한 것일까로 옮겨가는 듯하다.
대통령실은 고발장에 정보통신망법상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죄를 적용했다고 한다. 이 죄목은 피해자의 동의가 없으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에 속한다. 경찰은 “피해자의 처벌 의사를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실의 알림 문자에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경찰은 “김 처장을 비롯한 TF 구성원들이 피해자”라고 설명했다.
알고도 공개 안한 대통령실, 경찰 수사력만 낭비
설명을 듣고 나니 경찰의 처지가 딱해 보였다. 대통령실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애초에 있는 그대로 밝혔더라면 논란은 확 줄었을 것이다. 경찰이 진위를 확인하겠다며 재미없는 영화 2000편 분량의 영상을 보고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 한마디로 수사력 낭비다.
선택적 정보 공개가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진실과도 거리가 멀다. 대체로 뭔가 숨기고 싶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2014년 11월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이 제기됐을 때 박근혜 정부도 그랬다. 일단 터무니없는 의혹이라고 부인한 뒤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수사 결과는 예상대로 “정씨 개입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풍문에 불과한 의혹을 정리한 청와대 문건’을 언론에 유출한 혐의로 조응천 비서관과 박관천 경정을 기소했다. 그런데 정작 의혹을 보도한 취재기자들에 대해선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불기소처분 했다.
‘국정농단’ 때 경험…선택적 정보공개는 의심만 키워
뭔가 이상했지만, 그때는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정씨가 아닌 그의 이혼한 부인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가 국정에 지속적으로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청와대가 정해준 틀 안에서 놀아난 반쪽 수사, 부실 수사를 했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경험이 쌓이면 몸이 반응한다. 이번에도 대통령실이 일부의 사실만 공개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의심하게 된다. 뭔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최현철 사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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