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국어사전에게 제법 들켜왔지요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서로 안부를 늘어놓다가 폭우와 폭염 얘기로 대화의 물꼬를 텄는데 이내 우리 입에서 폭식·폭음·폭언·폭로·폭등·폭락·폭발·폭력·폭행처럼 ‘폭’으로 시작되는 단어가 앞말 잇기라도 되듯 줄기차게 불려 나왔다. “어쩜 입말이 죄다 폭이냐.” “지금 너나 나나 우리 삶이 저 사납디사나운 온갖 폭을 관통하고 있다는 거겠지.” “근데 나 폭 들어가서 설레는 단어가 순간 왜 떠오를까?” “뭔데?” “폭설.” “야, 너 연애하지?”
서가 맨 꼭대기에 있던 까만 몸피의 두꺼운 국어사전을 까치발로 집어 내렸다. 20여 년 전 처음 직장인이 되었을 적부터 출퇴근길 휴대 필수 품목이라 하면 이 사전이었다. 마을버스와 지하철, 시내버스와 도보를 행하는 근 5시간가량의 왕복 출퇴근길에 나는 어쩌다 자리가 나야 간신히 펴볼까 말까 하는 이 사전의 무게를 그러나 언제나 업은 채였다.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차창 너머 풍경처럼 매일같이 흔들리기 일쑤였던 나이기에 사전이라는 생김의 누름돌 또한 필요했던 건 아닐까.
지하철이나 버스에 앉게 되면 요령부득의 맹목적인 사전 읽기에 돌입하곤 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나가되 절로 손이 가는 대목은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두는 식이었다. 색이 거의 다 바래긴 하였으나 그 시절 내가 줄기차게 그어나간 단어들은 어째 비속어가 주되었다. 누가 시켰겠나, 내 마음 알아서 갈 곳을 찾은 거였겠지.
하루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내 엉덩이를 만지는 어떤 손이 있어 “야 이 ㅆㅅㄲ야 손 안 치워?”라고 냅다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 일순 내 주변 어디 틈이 있다고 사람들 멀찍이들 물러났을까 하면 그때 알았다. 사전이 가르쳐준 또 하나의 공부는 용기구나. 하는 짓이 얄밉고 더러운 남자를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라 사전이 가라사대 필요시에 이 용기는 계속 내봐야겠구나.
친구가 점을 보러 가자고 연락이 왔다. 난 사전 보고 있는 중이라 답했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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