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그날 이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159명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그날 이후 9개월하고 1주일 지났다. 한동안 추모객들이 오갔던 그 골목은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길이 됐다. 골목 입구의 상가도 비었다. 맞은 편 해밀톤 호텔 가벽 임시 추모공간에 시민들이 남긴 포스트잇 수천장만 위태롭게 붙어 있을 뿐이다. 골목을 ‘10·29 이태원 참사 기억과 안전의 길’이란 이름의 영구 추모공간으로 조성하자는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이대로 잊혀 가는 것이 좋은가.
참사 이후 시민과 언론, 전문가들은 참사 원인과 관련 개방된 장소에서 군중 밀집의 위험성에 대해 수많은 문제 제기를 했다. 특히 수용 한도를 넘은 다중 밀집 사고에 대한 대책과 핼러윈 행사처럼 주최자 없는 대규모 자발적 행사에 대한 안전 책임 주체의 명확화도 촉구했다. 군중 밀집은 지난 1월 공개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감정 결과에서도 드러난 참사의 직접 원인이었다. 좁은 골목에 최대 수용 밀도(㎡당 최대 5명)의 2~3배에 이르는 1800명 인파가 몰리면서 서로 밀착돼 떠밀리는 ‘군중 유체화’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국과수는 피해자들이 받았을 충격이 몸무게 70㎏인 남성 3~8명(224~560㎏)이 위에서 누르는 힘의 크기 정도라고 추정했다. 인파가 몰리는 곳이면 행사 성격, 장소와 무관하게 언제, 어디서든 다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국회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개방된 장소의 군중 밀집 사고를 재난관리법 재난 유형에 포함하지 않았고, 행정안전부 장관과 경찰청장에게는 주최자 없는 자발적 행사에 대한 안전 관리 책임과 조치 의무를 추가하지 않았다. 국회의원 299명은 33만㎡의 국회에서 1인당 1100㎡를 향유하고 있어 그날 골목의 밀도와 압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인가. 그간 유일한 입법 조치는 지난 4월 27일 재난관리법에 “특정 지역 다중 운집으로 인해 재난 사고 발생 우려가 있는 경우 기지국 접속 정보를 전기통신사업자 등에 요청할 수 있다”는 한 줄을 추가한 일이다.
그사이 여야가 당 대표부터 SNS로 실시간 소통하는 시대에 전국 방방곡곡을 막말 현수막으로 채우는 옥외광고물법을 합의 처리한 건 상징적이다. 이태원이든 오송이든 참사가 벌어지면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두 마디로 잘 싸우기만 하면 공천도, 총선 승리도 보장받는 그들만의 생존법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국민 대신 당 지도부와 강성 지지층만 모시는 정치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여야의 적대적 공생은 얼마나 큰 압력이 있어야 바뀌게 될까.
정효식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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