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야속한 폭염… 더딘 복구작업에 속 타는 수재민들
여전히 이웃집, 마을회관 등 전전
한낮 더위 탓에 복구 작업도 중단
탄저병 확산으로 사과 농사도 타격
지난달 폭우와 산사태로 사망자·실종자가 속출한 경북 예천군 주민들은 1일 집과 비닐하우스, 과수원 등 복구 작업에 한창이었다. 살인적인 폭염으로 복구 작업까지 더디게 진행되면서 집을 잃은 주민들은 마을회관, 숙박업소 등을 전전하는 중이다. 당분간 폭염이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주민들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예천군에는 모두 58명의 주민이 여전히 살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장맛비가 그치면서 산사태 위험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도 귀가해도 좋다는 안내가 나왔지만, 토사가 집을 덮쳐 살 곳을 잃은 이들은 돌아갈 곳도 없는 처지다.
감천면에서 만난 윤재순(69)씨는 보름 가까이 이웃집에서 지낸다고 했다. 감천면은 32명의 주민이 거처를 잃고 이재민 생활을 하는 중이다. 윤씨는 집이 토사에 휩쓸리기 직전 잠옷 차림으로 뛰쳐 나와 여벌의 옷을 챙기지 못했다. 그는 “자선단체에서 준 옷 한 벌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며 “이웃 할머니가 방을 내줘 같이 지내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경북도는 이달 중순 입주를 목표로 주민 임시거처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주부터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이마저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공사장 작업자 황병식(63)씨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 물을 계속 틀어놓지 않으면 콘크리트가 말라 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라며 “집을 빨리 지어드리고 싶지만 찜통 더위에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주택들이 우르르 쓸려나가며 마을이 초토화됐던 백석리도 복구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작업자 김모(52)씨는 “읍내에서 음식이나 물을 챙겨와도 금방 상하거나 식는다”며 “원래 군청에서 음식과 물을 지원해줬었는데 지난주부터 끊겼다. 복구 장비도 낡아서 에어컨이 안 나와 온몸에 땀띠가 났다”고 토로했다. 별도의 쉴 만한 실내 공간이 없어 복구 작업자들은 한쪽 벽이 무너진 농기계 창고 안에서 대충 끼니를 때웠다.
복구 작업에 나선 군 장병들도 폭염과 씨름해야 했다. 공군 91전대 911공병대대는 32명의 인원과 5대의 중장비를 예천 일대에 투입해 흙과 돌을 치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찬우 소위는 “얼음팩과 포도당 등을 갖추고 인원을 수시로 교대하며 복구 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벌방리 주민 윤수아(85)씨는 복구 작업 중인 군 장병과 소방대원들을 볼 때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를 꺼내 건네줬다. 윤씨 역시 폭우와 산사태로 주택 일부가 쓸려나가는 피해를 겪었다. 그는 수색 작업 중 숨진 고(故) 채수근 상병 얘기를 하면서 “우리 손자도 해병대를 나왔다. 도와주는 사람들 모두 손자 같다. 더운 날씨에 고생하는데 챙겨줄 게 없다”며 눈물을 훔쳤다.
곳곳엔 지역 명물로 여겨지는 사과나무가 길게 자란 잡초와 함께 방치돼 있었다. 습하고 더운 날씨 탓에 사과가 썩어들어가는 탄저병이 확산하면서 주민들은 더욱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평생을 바쳐 일군 사과나무 농장을 그냥 썩게 둘 수만은 없다며 일부는 뙤약볕에도 농장에 나가 약을 뿌리거나 잠을 줄여 일했다.
36년째 예천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권미경(59)씨는 “탄저병이 빗물을 타고 퍼지면서 약을 치지 않으면 안 된다”며 “한낮에는 도저히 일하지 못하니 새벽 4시에 일어나 오전에 잠깐 약을 뿌리고, 해가 지면 다시 밭에 나간다. 아오리 사과는 지금 따지 않으면 얼어 죽어 잠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상청은 적어도 이달 중순까지 폭염이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산사태로 망가진 집 정화조를 고치던 주민 권호량(73)씨는 “월남에 있을 때보다 더 더운 것 같다”며 “나도 몸무게가 6㎏ 줄었는데, 주민들 전부 지쳐 있는 상태다. 앞으로 계속 덥다는데 걱정이 크다”고 답답한 듯 말했다.
예천=글·사진 김재환 기자 j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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