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간격
미국에서 명문고를 거쳐 하버드의대에 입학한 혁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혁은 어릴 때부터 훈육이 필요 없는 모범생이었다.
“너는 세계적인 의사가 되어야 한다”라는 아버지의 말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다. 4대째 의사가 된 아버지에게서 중환자들의 고통에 관한 얘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환자의 병세가 악화하여 난처한 사고가 났을 때의 아픔을 아버지를 통해 직간접적인 아픔을 느낀 일이 한두 번이 아녔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에게 순종해서 하버드의대를 졸업한 혁은 앞날이 촉망되는 저명한 주임교수의 오른팔이 되었다. 백인사회의 차별 속에서도 동양인의 자존심을 지켜온 그는 세계적으로 권위를 자랑하는 메디컬저널지에도 그 이름이 오르내렸다. 혼기를 앞둔 그에게 혼담이 줄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잠시 서울에 온다는 연락이 왔다. 외아들을 미국에 보내놓고 그립던 부모는 아들이 돌아온다니 그를 맞이할 준비에 바빴다. 그가 도착하자 가족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늦은 시간까지 함께했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미국의학계의 새로운 정보도 들려주었고 우리나라의 열악한 의료 환경에 대한 심각한 얘기도 나누었다. 그는 미국생활에서 힘겨웠던 여러 사건도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특히 인종차별의 심각성은 국제사회의 암적 과제라며 열을 올리기도 했다. 밤늦도록 얘기를 나누던 혁은 호텔 예약이 돼 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서구적인 사고에 흠뻑 젖어있었다. 부모의 집에서 단 하루도 머물기 힘든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언제나 가족들의 감정을 배려하곤 했던 예전의 혁이 아니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는 부모는 마음이 섭섭하고 불안했다.
무엇보다도 아들의 정체성이 염려되었기에 반드시 한국인 며느릿감을 아들에게 추천하기로 가족들이 마음을 모았다. 하지만 신붓감을 추천할 때마다 혁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줄다리기하던 중 어느 날 아들에게서 결혼할 여자를 찾았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러나 신붓감이 미국인이라는 말에 가족들은 실의에 빠졌다. 그들은 자식을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은 자식과 원수 맺는 일은 피하자는 결심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아들이 미국에서 상견례를 하자는 제안을 해 왔기에 기대와 흥분으로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약속된 장소에 간 것이다. 며느릿감이 하버드생이라니 미국인이라는 것 빼고는 굳이 구구한 질문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되자 뜻밖에, 아! 뜻밖에 혁이 웬 흑인 여자와 함께 들어섰다. 그는 흑인 여자의 얼굴에 키스하며 부모에게 소개했다.“하이 맘 대디”하는 순간 어머니가 “어머!” 하며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아버지는 흥분을 참지 못해 아들의 따귀를 내리쳤다. 천하에 몹쓸 자식이라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내를 태운 구급차에 몸을 실은 아버지까지도 실신 상태가 되었다.
그 자리에서 혁은 “당신들이야말로 인종차별의 주범”이라며 “내 여자는 피부가 검을 뿐이지만 당신들은 마음이 검게 물든 사람들” 이라는 혹독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혁이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인종차별의 현장을 수없이 목격했을 것이다. 그 아픔들이 그에게 인종차별에 대한 증오심을 더 진하게 느끼게 했는지도 모른다. 학원 내에서 백인사회의 두꺼운 철벽을 수없이 경험해온 혁은 지난날 흑인들의 고통이 역사 속에 묻힌 옛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굳어져 있었다. 오늘날 미국의 힘과 능력은 어쩜 흑인들의 희생이 기초가 되어 견고하게 버티는지도 모른다. 긴 세월 동안 그들의 인생살이는 저주받은 삶이었다. 흑인 노예의 숫자는 곧 백인들의 재산목록이었으며 부녀자들은 주인의 욕구를 채워주는 성 노리개였다. 혁은 이유가 어떻든 사랑하는 사람과 그녀의 가족들이 백인사회에서 겪어온 고뇌를 곧 자신이 당해 온 듯이 느껴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댁의 사연을 듣고 난 후 몇 날 며칠 아니 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이 싸~ 아하고 저려온다. 내가 그 부모의 입장이라면 어떠했을까. 결혼은 두 남녀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양가의 문화가 서로 만나는 것이 분명할 텐데, 단일 민족인 우리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분들이 다행히 그리스도인이었기에 그 부모님은 늦은 나이지만 선교의 길을 택하여 남은 하반기 삶을 헌신키로 했다는 것이다. 그 결심이 사랑의 경지를 정복하는 자양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들과 딸을 두었으면 도둑놈이나 창녀를 보며 비난하지 말라는 옛 어른들의 덕담은 우리가 모두 충언으로 간직해야 하는 것일까?
하늘의 별처럼 바라보고 자랑스러워했던 자식의 배신은 부모의 가슴에 대못으로 박혔을 것이다. 사랑하면 국경과 문화, 인종까지도 초월할 수 있다는 자식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멀어진 아들과의 아픈 감정이 사라지는 날이 이를지라도 인종차별 문제는 먼 미래까지 우리 모두의 숙제가 되어 남을 것이다. 그 숙제가 풀리는 날 그날은 분명히 이 땅에 하늘나라가 임하는 영광의 날이 될 것이다. 그날은 이 땅에 천국이 임하기 때문에 인생 모두의 마음이 사랑과 평화만 가득하여 우리 입술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이 우리의 본업이 될 것이다. 사막에 꽃이 피고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 세상이 우리 눈앞에 현실이 될 것이라는 기상 첨예한 일이 펼쳐진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 맘에 새기고 기다리는 믿음을 붙들고 산다면 인간사에 모든 간격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날에는 사람 속에 혼탁한 영 미움과 배신과 질투와 모든 속임수는 우리에게서 영원히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두움의 본향과 빛의 본향이 나뉘는 그 기대를 이 시간에 붙들고 살아가자, 세상의 아픔과 증오와 질투가 없는 추상이 아닌 천국이 임하는 날 세상에 존재하는 너와 나의 간격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 : 5~)
<바다 같은 하늘>
창문도 지붕도 없는 하늘
칠흑 같이 어두울 때면
더듬거리지 말라
징검다리 되어주는 뭇별들
지상의 어지러움 나무라듯
느닷없이 떨어지는 별똥별
어둠 속에 더 두드러지는
영롱한 저 샛별
새벽 미명까지 홀로 하늘을 지키다
황금 왕관 쓰고 나온
저 태양 앞에 수줍은 아이처럼
살포시 숨어버리는 새벽별
속세를 비추는 하늘의 질서
좀과 동록이 없고
도적이 근접할 수 없는
하늘 그 위의 하늘에선 다 보이겠지
얄궂은 인생의 마음 속
쉼 없는 선과 악의 수레바퀴
장떼비 쓰레질 지나면
저 하늘 바다에 언약의 무지개 솟아나리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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