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 어린이와 놀이공간] 반듯한 놀이터가 재미도 있을까?
모든 공사의 출발은 바닥 평탄화 작업이다. 그런데 집을 짓는 것이라면 모를까, 놀이터를 만들 때에도 이 공식은 변함이 없다. 순천시 제1호 기적의 놀이터 ‘엉뚱발뚱’은 가파른 지형을 놀이요소로 활용해 눈길을 끌었다. 대부분의 놀이터 공사가 평탄화 작업에서 시작하는 것과 달리, 순천시는 굴곡진 지형 때문에 그곳을 제1호 놀이터 부지로 선정했다.
당시 순천시는 기적의 놀이터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좋은 놀이터의 몇 가지 기준을 세웠다. 그중 하나가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놀이 요소를 공간 곳곳에 디자인으로서 숨겨놓는다는 것’이었다.
1호 놀이터에는 경사진 지형을 따라 원통형 미끄럼틀을 설치했다.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오른 뒤 미끄럼틀을 타고 언덕 아래로 내려갈 때 아이들은 기쁨에 겨워 비명을 지른다. 비탈을 따라 설치한 원통 구조물은 신나는 놀이 기구이자, 비밀작전을 짜는 아지트가 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도록 설계한 인공 개울은 놀이터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언덕 놀이터는 돌, 흙, 통나무 등 자연 소재 놀이 재료와 어우러지며 아이들에게 변화와 의외성이 있는 놀이공간을 선물했다.
영국 런던 켄싱턴·첼시 구의 홀랜드 파크 모험 놀이터도 지형을 살려 놀이 공간으로 조성한 대표적인 사례다. 비탈진 지형을 그대로 둔 것은 물론, 비만 오면 물이 고이는 구간을 아예 습지로 만들어버렸다.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설계를 맡은 에렉 건축사무소는 질퍽질퍽한 땅이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독특한 놀이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설계팀은 비가 고이는 경로를 여러 곳으로 분산해 물이 넘치는 위험을 줄였다. 고인 물이 흘러 연못으로 가고 다시 땅속으로 스며드는 일련의 과정은 아이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습지는 어린이들이 자연과 환경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도 효과적인 공간이 된다. 누군가에겐 ‘문제’였을 지형적 특성을 놀이와 학습의 요소로 바꾼 것이다.
어떤 놀이터는 자연재해를 통해 생겨나기도 한다. 뉴욕 브루클린 프로스펙트 공원에 있는 주커 자연탐험지역(The Donald And Barbara Zucker Natural Exploration Area)이 그랬다.
2012년 태풍 샌디가 휩쓸고 지나간 후 아름드리나무 수백 그루가 쓰러졌다. 처리 방법을 찾던 관리자들은 쓰러진 나무 중 일부를 껍질만 벗겨 탐험지대에 배치하기로 했다. 나무는 마치 조금 전 태풍이 훑고 지나간 것처럼 여기저기 아무 곳에나 놓였다. 어른들이 보기에 분명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큰 나무 사이에 숨고, 올라타 균형을 잡고, 아지트를 만들며 도전과 모험을 즐겼다.
이곳은 프로스펙트 공원에 있는 7개 놀이터 가운데 가장 인기가 많다. 뉴욕 매거진(New York Magazine)은 아이들이 자연과 교감할 수 있고 구조화되지 않은 놀이를 장려하는 이곳을 ‘뉴욕 최고의 놀이터’로 선정했다. 전체 놀이구역을 조성하는 데에는 약 6개월의 작업 기간과 20만 달러의 예산이 투입됐다.
고물도 아이들이 매우 좋아하는 놀이 재료다. 주커 탐험지역의 낡은 나무처럼 폐목재, 버려진 싱크대와 같이 평소 만질 수 없는 물체에 아이들은 깊은 관심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한 곳도 공구가 즐비한 창고나 이런저런 물건들이 가득 쌓인 공사장이었다.
제주의 한 숲유치원 형태의 어린이집에선 바깥 놀이터에 다 쓴 냄비와 프라이팬, 국자, 밥그릇 등 부엌에서 실제 어른들이 쓰던 고물을 가져다 둔다. 아이들은 흙을 체에 걸러 ‘수프’를 끓이거나, 흙반죽을 만들어 모양을 빚으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논다. 엄마와 아빠처럼 요리를 하고 손님에게 대접하는 등 기승전결이 있는 나름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며 역할 놀이에 푹 빠진다.
나무 아래 아이들이 모인다
놀이터를 만들 때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나무를 부지 주변에 배치한다. 정작 놀이기구가 있는 중앙부에는 그늘이 없어 여름이면 아이들을 더 찾아보기 어렵다. 이용자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데도 공사 발주자들은 1970년대 도시 공간 재정비와 함께 보급하던 놀이터 형태를 50년째 고집하고 있다. 이제 막 만들어진 초등학교 놀이 공간도 그늘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되기는 마찬가지다.
영국과 독일, 일본 등 놀이 선진국에서는 가장 수세가 좋은 나무를 중심으로 놀이터를 디자인한다. 이것은 공간의 특성을 살려 저비용으로 가장 개성있는 놀이공간을 탄생시키려는 디자이너의 인식과 필요에서 출발한다.
앞서 언급한 런던 홀랜드 파크의 모험놀이터도 구역에서 가장 큰 아름드리 나무 주변에 복합놀이기구를 설치했다. 매년 100만명이 찾는 런던 켄싱턴가든의 다이애나 메모리얼 플레이그라운드도, 런던시가 낙후한 동부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야심차게 조성한 텀블링베이 모험놀이터도 나무를 빼놓고는 공간을 설명하기 어렵다. 모험놀이터의 천국인 일본에서는 나무가 가장 중요한 놀이터의 구성 요소가 된다.
나무가 아이들의 놀이를 돕는 방법은 다양하다. 우선 그늘을 만든다. 강한 햇빛을 막아 아이들이 더 오래 놀이공간에 머물게 한다. 풍성한 잎은 놀이터를 아지트처럼 아늑하게, 때론 전투기지처럼 위용있게 만든다. 나무에는 새와 갖가지 곤충이 산다. 나무는 아이들이 자연을 관찰하는 통로가 된다. 술래가 등을 돌리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는 공간도 나무다. 인공 그늘막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도구라면, 나무는 그 외에 여러 가지 효용으로 아이들의 놀이를 확장해준다.
제주의 유치원에서도 이 같은 이유로 놀이 공간에 나무 식재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 나무를 심는 경우는 적다. 큰 나무를 심기에는 중장비를 투입해야 하는 과정이 부담스럽고, 작은 나무를 심으면 당장 나무가 만들어줄 그늘 면적이 작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놀이 과정에 나무가 주는 여러 이점을 고려한다면 학교 숲이 없는 유치원의 경우에는 건물을 신축하거나 바깥 놀이공간을 개선할 때 가장 풍경 좋은 곳에 나무를 심고 그 구역을 중심으로 놀이공간의 구조를 구상해나가는 도전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평상도 나무만큼이나 놀이 공간을 풍성하게 해주는 요소다. 놀이 사이사이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여러 친구가 이용하는 놀이에서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장소가 되어준다. 실외에서도 신발을 벗고 앉거나 누워서 놀 수 있다. 교사나 보호자가 편안하게 아이들의 놀이를 지켜볼 수 있게 해 놀이 시간을 늘려주기도 한다. 평상은 놀이 공간의 기존 구조물이나 구상 방향에 따라 높이, 넓이, 모양을 다양하게 제작해 사용할 수 있다.
글·사진=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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