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택받은 주민들" 아파트 대표의 광기 어린 결정
[하성태 기자]
▲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
ⓒ 롯데엔터테인먼트 |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그런 상념에 젖곤 했다. 우리 관객들은 언제 흥미진진하면서도 세련된 인간군상극을 만날 수 있을까. 한국영화에서 '국뽕'과 '신파'를 벗어재낀 디스토피아물을, 그런 재난물이나 장르물은 언제 도착하려나. 관객들을 믿지 못해 감성에 절절하게 호소하거나 가르치려드는 성향들은 언제까지 지속되려나.
예컨대, 안개 하나만으로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미스트>가 공개된 것이 2007년이다. 스티븐 킹의 동명 중편 소설이 원작이었고, 각본가 출신인 <쇼생크 탈출>의 프랭크 다라본트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했다. 사람을 죽이는 안개 때문에 마트에 갇힌 인간의 욕망, 공포, 사랑, 사회와 정의의 규범 등을 날렵하고 세련되게 묘사된 이 품격 갖춘 소품은 전 세계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냈었다.
인기 미드 시리즈 <워킹데드>나 최근 미국인들을 열광케 한 <더 라스트 오브 어스>도 그런 속성을 공유한다. 좀비나 호러라는 장르적 외피를 한 꺼풀 벗겨보면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집단과 조직을 결성한다. 외부인을 경계하거나 받아들이거나 살육한다. 집단과 집단이, 개인과 집단이 맞서거나, 혹은 공존하거나. 자의반 타의반 살인이 정당화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인간들이 인간성을 고뇌한다.
낡은 그린홈 아파트를 배경으로 주민들이 외부의 적과 내부의 의심과 맞서는 생존기를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도 <미스트>의 속성을 일정 정도 품고 있고 오마주를 바치기도 하는데, 괴물 묘사에 대한 과한 집착이나 판타지 장르의 속성에 기대면서 현실성을 휘발시키며 절반의 성공으로 남았다.
그리고,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왔다. 분명 놀랍다. 좀비도, 미지의 생명체나 호러 장르의 기운도 없다. 어느 순간 서울이 폐허가 됐다는 설정만으로 앞서 열거한 인간 본성의 처절한 탐구를 용기 있게 성취해내는 한국영화가 도래했다.
게다가 순제작비만 200억 이상 들인 대작이다. 디스토피아 재난물의 걸맞은 그 폐허를 구현하기 위해 VFX에도 공을 들였고, 설득력 있는 수준급 그림을 자랑한다. 대중성 있는 수작들을 소개하기로 정평이 난 제48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공식 초청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눈 뜨고 일어나보니 세상이 망했습니다, 우리 아파트만 빼놓고.' 어느 웹소설이나 웹툰의 제목 같겠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거두절미 직진으로 밀어붙이는 설정이 딱 이렇다. 아니나 다를까 김숭늉 작가 <유쾌한 왕따> 2부 '유쾌한 이웃'이 원작이다. 넷플릭스 < D.P. >와 <지옥>을 제작한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작품이다.
주인공인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 부부는 황궁아파트 602호 자가 소유자다. 민성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여유 없이 살다보니 공무원이 돼 있었다. 명화는 아이도, 환자도 돌볼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의 간호사다. 이 둘이 세상 모르게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건물들이 죄다 무너져 내려 버렸다. 재난 그 자체다. 주위에 남은 건 이들이 살고 있는 황궁아파트 뿐이다.
자 이제 벌어질 법한, 동종 장르영화에서 친숙하게 목격해왔음직한 광경들이 연쇄적으로 펼쳐진다. 생존 본능과 패닉 사이. 공황에 빠질 법도 한데 이 아파트 주민들은 꽤나 침착하다. 물물 교환도 하고 식량도 비축하며 나름 질서 유지에 힘쓴다. 그래도 외부인의 침입은 막을 수 없다. 조직이, 대표가 필요하다. 이때 1층에서 발생한 화재를 영웅적 활약으로 막아낸 영탁(이병헌)이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그는 이제 황궁아파트 대표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 주민만이 살 수 있다', '주민은 의무를 다 하되 배급은 기여도에 따라 차등 분배한다'. 바로 공동 생존의 원칙이 세워진다. 일명 '바퀴벌레'라 불리는 외부인들을 무력으로 추방시킨다. 명화가 집으로 거뒀던 모녀도 쫓겨날 운명이다. 이 모두는 아파트 주민들의 합의로 이뤄진다. 가차 없다. 내가, 내 가족이 먼저 살기 위해서다. 게다가 계절은 바깥에서 얼어 죽기 딱 좋은 한겨울이다.
보급대가, 방범대가 결성되고, 의료시스템이 갖춰지며, 배급제가 실현된다. 그렇다. 잠시 잠깐 디스토피가 아닌 유토피아가 찾아 온 듯 보인다. 바퀴벌레들은 철저히 차단했다. 그들 말로, 서울 그 어디에서도 이런 공간은 존재하지 않을 듯 보인다. 연말 파티를 열고, 술판을 벌이고, 리더십을 인정받은 영탁이 노래 '아파트'를 불러 젖힐 때까지만 해도 이 평온이 오래 지속될 줄 알았다. 균열은 집 나갔던 혜원(박지후)이 원래 자기 집인 영탁의 옆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혜원의 귀환 이후 또 다른 불청객들이 찾아 온다.
콘크리트는 현대사회의 은유이지만 그 자체로 콘크리트 구조물인 아파트를 직유한다. 그런데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이다. 부동산 공화국이자 아파트 공화국이다. 2018년 아파트에 거주하는 비율이 절반을 넘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리는 재난 상황 속 아파트 주민들의 상황은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충분하다.
그래서 이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대처는 이중성을 띤다. 일반 보편적인 인간의 생존 본능을 상징하는 동시에 아파트 공화국 구성원들의 집단 이기심을 아우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더 나아가 이념의 광기에 휩싸인 인간들의 끝 간 데 없는 폭력성을 연상시킨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이념은 내 아파트를, 황궁 아파트 한 동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생존본능의 광기다. 직설화법보다는 곳곳에 배치된 대사 등으로 유추할 정도이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자가나 전세 여부로, 강남인지 강북인지로, 서울인지 경기권인지, 수도권인지 비수도권인지로 계급을 나누는 부동산과 아파트 공화국의 광기를 은유를 한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이때 가장 무서운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아파트를 지켜내기 위해 살인까지 마다않는 그 사람 말이다. 영화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존재는 다름 아닌 리더이자 아파트 대표인 영탁이다. 이 영탁을 바로 이병헌이 연기했다.
▲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
ⓒ 롯데엔터테인먼트 |
이병헌이다. 데뷔 30년이 넘은 그 이병헌이다. 그는 서민, 사회적 약자를 연기할 때 더 진한 사람 냄새를 풍긴다. 악역을 연기할 때도 그 정도는 아닌데, 영탁은 이 두 요소를 기막히게 섞어 놨다. 전역한 군 출신에다 택시도 몰고 산전수전 다 겪은 영탁은 평범한 소시민이다. 빚에 시달리니 처자식에게 더 미안한 가장이다. 세상이 폐허가 되기 전부터 아파트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 아파트가, 그리고 우리 주민들이 선택받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복합적인 한 마디가 이 영탁이란 캐릭터를 그대로 상징한다. 이 영탁을 연기한 이병헌은 드라마를 제외한 영화만 놓고 봤을 때 근래 들어 만장일치의 평가를 끌어낼 만한 열연을 펼친다. 그만큼 영탁은 드라마틱한 동시에 다면적인 인물이고, 후반부로 갈수록 재난 상황을 이겨내고 아파트 공화국을 수호하려는 광기로 치닫는다. 번뜩이는 이병헌의 눈빛을 스크린으로 확인하는 일은 분명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기능한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가성비 넘치는 한국영화계의 기술력은 두 말할 나위 없을 것 같다. (대사로 등장하는) <드림팰리스>에 이어 또 다시 아파트 공화국을 소재로 한 영화에 출연한 부녀회장 역의 박선영의 연기도 안정적이다. 박서준이나 박보영 역시 제 역할을 다한다. 때때로 '왜?'란 물음표를 남기는 캐릭터들의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건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다.
하지만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처음 맞는 여름 '빅4' 시장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마주하는 일은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잉투기>로 데뷔해 주목을 받았던 엄태화 감독의 주제를 밀어붙이는 뚝심과 이를 안정적으로 그리는 연출력은 상찬받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다만,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이 예정된 디스토피아 재난 상업영화를 관객들이 얼마나 반길지는 의문이다. 여기에 더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서늘하면서도 명확한 결말이 가리키는 주제가 그 자체로 어느 정도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어쩔 수 없다. 부동산 아파트 공화국의 영화 밖 풍경은 영화 못지않은 공포 그 자체다. 갭 투자의 그늘 반대편에 자리했던 일부 아파트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절규가 아직 생생하지 않은가. 그 와중에 대통령 부인 일가의 양평 땅 아파트 개발 의혹이 정국을 강타 중이다. 부동산 아파트 공화국에 자포자기 순응하거나 열성적인 일원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영화처럼 목숨 바쳐) 강렬히 저항하거나.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 안팎의 현재가 이 정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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