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에 효자" 웃음꽃 핀 그곳…탑골공원 노인은 찾지 않았다, 왜 [르포]
서울 낮 최고기온이 34도를 기록한 지난달 31일 정오. 서울 종로구 종로2가 탑골공원에선 십여명의 노인들이 푹푹 찌는 날씨 속 팔각정이나 삼일문, 동상·큰 나무가 만든 그늘에 흩어져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종로구에만 74개 무더위쉼터가 운영 중이다. 탑골공원에서 700m만 걸어가면 서울노인복지센터 무더위쉼터도 있다. 팔각정 계단에 앉아있던 A씨에게 무더위쉼터에 가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귀찮은 듯 “모른다”는 말만 돌아왔다.
찜통 더위에도 쉼터보단 탑골공원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다시 확산하는 상황에서 탑골공원을 찾은 노인들은 실내인 무더위쉼터보단 익숙한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은 눈치다. 탑골공원에선 무료 급식이 제공되고, 장기판 등 구경거리도 있다. 지하철 3호선 종로3가 역과 가까워 이동도 편하다. 이날 종로3가 역사 안 곳곳에선 노인들이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서울시는 8월 현재 무더위쉼터 4200여곳을 운영 중이다. 무더위쉼터는 크게 동주민센터나 사회복지관과 같은 공공시설형과 경로당·아파트 등 사설 단체·주민이 관리하는 민간형으로 구분한다. 본지 취재인이 이날 유형별로 둘러보니 유명무실한 곳도 있고, 사랑방 역할까지 하는 곳도 있었다.
민원실 무더위쉼터로 겸용...'썰렁'
같은 날 방문한 중구 소공동주민센터 입구엔 무더위쉼터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서울시는 무더위쉼터 면적을 최소 16.5㎡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니 쉼터를 찾을 수 없었다. 민원실 에어컨에 ‘무더위쉼터 불편신고 요령’을 담은 A4 용지만 눈에 띄었다. 주민센터 관계자는 “1층 민원실을 무더위쉼터로 겸용하고 있다”며 “(각 주민센터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공간 부족으로 대부분 기존 공간을 무더위쉼터로 겸용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본지 기자가 찾은 오전 10시부터 한 시간 가량 일부러 쉼터를 이용하려 주민센터를 방문한 시민은 한 명도 없었다.
공공형 쉼터의 경우 홍보가 다소 부족한 느낌이다. 서울 J종합사회복지관의 경우 건물 별관 5층 복도 공간 일부를 간이 도서관으로 사용 중인데, 폭염 특보 발령 시 무더위쉼터로 겸용한다. 이날 특보가 발령됐지만 썰렁한 모습이었다. 이에 쉼터 위치나 개방시간 등 정보를 대중적인 지도 제공 업체와 공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카카오 지도 애플리케이션에서 ‘무더위쉼터’를 입력하면, 전국에 딱 7개만 검색된다.
동네 사랑방 역할까지 하는 쉼터
반면 이날 중구 S아파트 내부에 설치한 무더위쉼터는 활기찼다. 주민 3명이 모여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쉼터가 동네 ‘사랑방’ 역할까지 하는 분위기다. 만족도는 높았다. 주민들은 “구청이 최신 에어컨까지 사줬다”며 “폭염엔 무더위쉼터가 효자”라고 웃었다. 다만 아파트 내부에 있는 만큼 입주민이 아니면 현실적으로 이용이 어려웠다. 무더위쉼터 관계자는 서명된 방명록을 보여주면서 “하루에 많을 땐 38명까지 오는데, 1명 빼고 다 우리 아파트 주민”이라며 “나머지 1명도 원래 여기 살다가 이사했다”고 말했다.
종로3가역 인근엔 D쪽방상담소 무더위쉼터가 있다. 정문에 제빙기가 (있단) 안내문도 부착해놨다. 하지만 기자가 “무더위쉼터를 이용하고 싶다”고 말하자, 파란 조끼를 입은 관계자가 “쪽방촌 주민이 아니면 사용이 어렵다”고 했다.
문 턱 높은 무더위 쉼터?
D쪽방상담소처럼 주민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민간형은 대체로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인 분위기다. 서대문구가 무더위쉼터로 지정한 M경로당에 방문하자 관계자는 “우린 다른 데랑 달리 자치회가 운영하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설명했다.
무더위쉼터는 원칙적으로 시민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보면, “문턱이 지나치게 높은 것 아니냐”는 의문이 나온다. 하지만 거꾸로 “제 역할을 한다”는 반론도 있다. 특정인이 사용하는 게 아닌 주거 환경이 열악하거나 온열 질환에 취약한 노약자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준다는 쉼터 본래 취지를 충족해서다.
서울시 관계자는 “예컨대 노숙인이 쪽방상담소 무더위쉼터를 점령하면 이번엔 반대로 쪽방촌 주민이 불편할 것”이라며 “노숙인은 거리노숙인 무더위쉼터를 이용하고, 쪽방촌 주민은 쪽방상담소 무더위쉼터를 이용하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서울시는 이달 한 달간 폭염재난 대응 수준으로 취약계층 지원과 피해 예방에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사회복지시설에 7억3500만원의 냉방비를 추가 지원하고 쪽방촌 주민이 열대야를 피할 수 있는 ‘밤더위 대피소’를 확대 운영한다. 쪽방촌에 주위 온도를 3∼5도가량 낮추는 효과가 있는 안개 분사기(쿨링포그), 창문형 미니 에어컨 등도 설치할 예정이다. 폭염특보 발효 땐 돌봄서비스 전문인력 3279명이 매일 또는 격일로 취약계층의 안부를 확인한다. 10만원 이내 냉방용품비 등을 지원하는 긴급복지서비스도 작동한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불륜녀 신음 소리만 들렸다…몰래 녹음했는데 괜찮다고? | 중앙일보
- "굶어 죽은듯"…7년간 열대과일만 먹은 비건 인플루언서 사망 | 중앙일보
- 장필순, 애견호텔 고소…업체 "남편 누군줄 아냐 협박 당해" | 중앙일보
- 여장남자의 성폭행?…일본 '머리없는 시신' 사건 전말 | 중앙일보
- “한국이 압구정공화국인가” 고발까지 간 3구역 사태 전말 | 중앙일보
- 대전 명물 '튀소'에 난리…경찰, 4만명 몰리자 '말뚝' 세웠다 | 중앙일보
- 창문 두드렸지만…세계 고층건물 오르던 남성 홍콩서 추락사 | 중앙일보
- 누구는 95만원, 누군 41만원…연금액 가른 '시간의 마법' | 중앙일보
- "출연진 불화로 하차" 가짜뉴스였다…주병진 5년만에 명예회복 | 중앙일보
- "불륜의 힘" "도둑놈들"…막장 현수막에, 내 세금 쏟아붓는다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