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대의 은퇴일기㉛] 남한강 카페에서 만난 '청신한 젊음'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라고 어느 문인은 노래했듯이 가만히 있어도 신록의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따스한 햇볕이 비치는 카페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며 오월을 닮은 젊음을 바라보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지난봄 3일 연휴를 맞아 1박 2일 일정으로 양평으로 떠났다. 이른 아침이라 자동차가 밀리지는 않아 다행이다. 산과 들에 펼쳐진 싱그러운 녹음은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아가씨 같아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아직도 가슴이 뛰는 것 보니 청춘의 기운이 살아있는 모양이다.
시골에서 하루를 보내자 몸과 마음이 가뿐하다. 연휴 마지막 날이라 서울로 들어오는 길이 많이 지체될 것 같아 점심을 먹고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 내비게이션을 켜자 온통 빨간색이다. 평소보다 2배나 더 소요된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카페에서 좀 쉬었다가 느지막한 시간에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가끔 들렸던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를 찾았다. 앉을 자리가 없을 줄 알았는데 듬성듬성하다. 서울로 가는 귀갓길이 지체될 것 같아 대부분 이미 떠난 것 같다. 평소에 잘 나지 않던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평온하다.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한 잔씩 시키자 조그마한 크래커 2개를 같이 내온다. 커피를 마시며 바깥을 바라보자 시간이 멈춘 듯하다. 창밖으로 퍼지는 산들바람과 햇살을 받은 나무나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넓어지면서 마음속에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감정들이 솟아난다. 나는 노트북을 펴고 아내는 책을 꺼냈다.
강 건너 도로에는 자동차 행렬이 꼬리를 물고 서울 쪽으로 느릿느릿 움직인다. 카페 앞 강변도로에는 손을 잡은 연인들이 드문드문 스친다. 멍하게 앉아 있자 옛 시절로 쑥 빨려 들어간다. 신혼 때 아내와 둘이서 휴일이면 기차나 버스를 타고 신나게 다녔다. 배낭에 코펠과 버너와 같은 조리도구와 텐트와 침낭까지 위에 묶고도 무거운 줄 몰랐다. 40년도 더 지났는데 최근의 일처럼 느껴진다. 마음은 그때나 별 차이가 없는데 이젠 추억을 먹고 살 나이가 된 것 같아 씁쓸하다.
손님들이 하나둘 빠지더니 두 테이블에만 앉아 있다. 실내가 한가해지자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 차림의 남녀는 세탁하려는지 창문에 달린 커튼을 떼어낸다. 높은 곳이라 남학생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고 여학생은 밑에서 챙긴다. 다른 곳은 모두 걷었는데 우리가 앉은 창가의 커튼만 남았다. “왜 떼지 않으세요?”라고 하자 “먼지가 날 것 같아 손님이 나가고 나면 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옆 테이블로 옮길 테니 여기도 마저 하세요.”라고 하자 감사하다며 작업을 마무리한다.
조금 있자 쟁반에 작은 케이크 2개를 가져온다. 자리를 옮겨주고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단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인데 마음 씀씀이가 착하고 고맙다.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으로서 그냥 지나친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텐데 배려하는 마음씨가 가상하다. 교외에 있는 카페인지라 6시면 영업을 종료하기에 5시 반이 되자 “더 주문할 것이 없으세요?”라고 물어온다. 넓은 카페에 손님이 우리밖에 없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6시면 퇴근해야 하는데 우리가 있어 마무리를 못 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 마음 놓고 정리할 수 있도록 지금이라고 나가고 싶지만, 도로가 밀려 길거리에서 지체할 것이 뻔하여 그러지도 못하여 미안스럽다.
주인은 없지만, 아르바이트 학생들은 서로 힘을 합쳐서 커피잔을 닦고 청소하고 정리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눈길이 자꾸 가서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보았다. 남학생은 키가 훤칠하고 깔끔한데다 설거지 같은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 보통은 여학생이 설거지하고 남학생은 뒷정리하는데 이 학생은 밝은 모습으로 날렵하게 움직이며 정리를 한다. 여학생은 세상 풍파에 물들지 않은 청순한 모습이다. 예쁘장한 얼굴에 성격도 발랄하면서 싹싹해 보인다. 피천득 선생이 ‘오월’이라는 시에서 이야기한 청신한 얼굴이다. 집에 있으면 부모님이 다 해줄 텐데 아르바이트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아르바이트는 꼭 경제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 경험을 쌓는 차원에서도 좋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여학생은 떼어낸 커튼을 큰 비닐봉지에 넣어 들고 나간다. 퇴근하면서 세탁소에 맡길 모양이다. 걸어서 가는 것 보니 주변에 거주하든지 아니면 큰길로 나가 버스를 타고 가는 것 같다.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보아 남자친구와 데이트 약속이나 뭐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뜻 보고 판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느 집 자녀들인지 가정교육을 잘 받은 것 같다. 우리 아들딸도 바깥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 눈이 저렇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혼기를 앞둔 자식이 있으면 식구로 맞아들였으면 좋겠다는 마음마저 든다. 고희를 바라보는 어른들은 얼굴만 봐도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비춰질까? 고집 세고 욕심 많은 나이 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지 두렵다. 공자는 40세를 불혹이라 하면서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는데 어느덧 지천명과 이순을 지났다. 더욱 낮추며 살아야겠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친절하고 밝은 모습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점점 굳어져 가는 내 표정을 지금부터라도 웃는 연습을 해서 미소가 깃들고 좀 더 인자한 얼굴로 만들어 봐야겠다. 전화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지금 당장 먼저 연락해 봐야지. 깜짝 놀랄 친구들과 애들의 얼굴을 그려본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쥴리 스펠링은 아나' 진혜원, 반성하는 모습 없으면 실형 선고 가능성" [법조계에 물어보니 198]
- "장애친구 옷 벗기고 구타, 소변도 먹여…" 막나간 여중생들
- 이제 누가 주호민의 아들을 돌볼 것인가
- 허벅지 서로 내려쳤나…차에서 발견된 30대男 둘, 무슨 일
- '여명 비례 투표'라니…與 "또 어르신 폄하"에 野 부랴부랴 뒷수습
- "이재명 '김문기 몰랐다' 발언 유죄 명백…죄질 나빠 벌금 100만원 이상 선고될 것" [법조계에 물
- 민주당 '탄핵 몽니'에 '정치적 해법' 준비하는 국민의힘
- "의결 정족수 200명 모을 것" 범야권 '탄핵연대' 출범…국회 점입가경
- 의심하고, 해체되고…콘텐츠 속 흔들리는 가족들 [D:방송 뷰]
- ‘대만 쇼크’ 한국야구, 또 첫판 징크스에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