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조종사 아들의 전화... 아버지는 무너졌다

손우정 2023. 8. 1.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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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세상 떠난 지 12년 만에 '순직' 결정 얻어낸 박향규·김정화씨

이 기사는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한 글을 축약한 것입니다. 전체 글은 2023년 9월 13일 발간 예정인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5년 종합활동보고서 피해사례집>에 수록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손우정 기자]

▲ 故 박종우 박종우는 학창시절 반장, 부반장을 도맡아 했을 정도로 누구나 따르고 좋아했던 모범생이자 금지옥엽같은 모범 아들이었다.
ⓒ 손우정
 
금으로 된 가지와 옥으로 된 잎(金枝玉葉). 귀하디귀한 자식을 칭하는 말이다. 누구에게 귀하지 않은 자식이 있을까만은, 박종우(1984~2009)는 유독 금지옥엽 같은 자식이었다. 언제나 정직했으며 성실했고, 책임감은 강했다.

4살 때 태권도를 시작해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어릴 적 꿈은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지만, 경찰이나 군인이 되고 싶다는 꿈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리더십도 뛰어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 부반장을 도맡아 했고, 고등학교 때는 전교 부회장을 맡았다. 누구나 따르고 좋아했던, 금지옥엽 같은, 어느 하나 모난 곳 없는 모범생, 모범 아들이었다.

박종우는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을 헤아릴 줄 아는 성숙함도 있었다. 부모에게도 쉽게 손 벌린 적이 없었다. 대학도 입학금만 내고 줄곧 장학금을 받았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학군단에 들어가 대대장 후보생을 했다. 그리고 딱 한 번, 부모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학군단 기념 반지값 35만 원이 없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부모는 기가 찼다.

"야, 이놈아! 이 정도는 그냥 달라 해라!"

나무라는 듯 이야기했지만, 내심 대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은 2007년 3월 1일, 대학을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 9공수여단에서 특전사 부중대장으로 1년간 임무를 수행했다. 그 후 육군 조종사 양성과정에 지원해 선발된 후 육군항공학교에서 약 8개월간 헬리콥터 조종사 교육을 받고, 육군 제13항공단 501항공대대에서 헬기를 모는 조종사로 보임됐다. 행복했다. 평생 군인으로, 조종사로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 모범생, 모범 아들이었던 박종우는 이제 모범 군인으로 쭉 살아갈 줄 알았다.

이런 아들이 조금씩 달라진 건 2009년 1월, 육군항공학교 수료 후 항공단 본부에 파견 근무를 나간 후부터다. 이때부터 한밤중에 집으로 전화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떤 때는 새벽 2시나 3시에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냐고 전화하면, '할 일이 남아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휴가 나오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에야 집에 왔다.

"요즘은 왜 이렇게 휴가를 안 나오냐고 그랬더니 바빠서 그렇대요. 아들이 원래 힘들어도 내색을 잘 안 해요. 그런데 확실히 얼굴도 어둡고 말수도 줄었어요. 그러더니 언젠가 '평생 (군인) 하려고 했는데 몇 년 후에는 전역해야 할 것 같아'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애 아빠가 그랬어요. '야, 세상에 쉬운 일은 없어.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 봐.'"(박종우의 어머니 김정화)

무엇이든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말았던 아들은 평생 직업으로 생각했던 조종사를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처음으로 내보였다. 파견 근무가 끝나고 원대복귀 직후, 잠시 휴가를 나왔다. 온 가족이 함께 집 근처로 대게를 먹으러 갔다. 아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식사 후 아버지는 아들과 나란히 일산 호수공원을 걸었다.

"종우 어깨가 축 처져 있었어요. '야, 너 무슨 고민 있냐?' 그러니까 '없습니다.' 그래요. 그냥 '알았다'하고 말았어요."(박종우의 아버지 박향규)

그리고 이틀 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던 모범 아들 종우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편제에도 없던 경리장교의 굴레

중위 박종우는 원대로 복귀한 2009년 7월 6일 오전 11시, 숙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로 발견됐다. 박종우는 항공단 본부로 파견된 후, 원하던 헬기 조종사가 아니라 편제에도 없는 경리장교로 보직 명령을 받았다. 당시 항공단 본부에서는 인사 담당이 경리업무까지 보고 있었지만, 업무가 너무 많아 유독 '똑똑하게 보였던' 박종우를 경리장교로 차출한 것이다,(항공단 지원장교 소령 양○○, 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13쪽).

조종사를 꿈꿨던 박종우는 조종간 대신 온갖 영수증과 서류 더미에 파묻혀야 했다. 당시 헌병대와 훗날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평일에는 밤 10시에서 12시까지, 월말이나 월초에는 새벽 서너 시까지 업무를 봐야 했다(항공단 인사행정병 이병 박○○, 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11쪽).

군대에서 경리 관련 업무란 것이 단순히 업무량만 많은 것은 아니었다. 금전을 다루는 일은 조금만 잘못되어도 무수한 지적이 날아들었다. 박종우가 전입을 오자마자 경험도, 편제에도 없는 경리장교 보직을 맡은 순간, 업무 과중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상관은 깐깐하고 꼼꼼하기로 유명했다(항공단 지원장교 소령 양○○, 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11쪽).

당시 헌병대 조사기록에 따르면, 경리담당관이 다른 부대로 전출 간 어느 소령의 항공증식비와 영외급식비 2만 원을 회수하기 위해 박종우와 19차례나 통화한 기록도 나온다(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12쪽). 이런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갓 파견된 경리장교 박종우가 오롯이 짊어져야 했다. 다른 경리장교는 보통 행정병에게 대신 업무를 맡기고 확인만 했지만,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그는 모든 일을 스스로 마무리했다(항공단 인사행정병 이병 박○○, 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11쪽).

이처럼 박종우가 경리장교를 맡은 후 매우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과 증언에 나타난다. 아마도 박종우는 원대로 복귀해 원래 받은 보직대로 헬기를 조종할 날만을 기다리며 모든 순간을 감내했을 것이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원대복귀는 그에게 헬기 조종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복귀 후에도 다시 경리장교를 담당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유난히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똑똑하게 보였던 그의 성격이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무너진 신뢰, 기나긴 싸움
 
▲ 박종우의 아버지 박향규, 어머니 김정화 박종우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현충일을 앞둔 6월 4일, 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는 아들을 찾았다. 부모는 아들의 사망 후 4년 동안 쉬지 않고 싸웠지만 완벽하게 졌다.
ⓒ 손우정
 
아버지 박향규와 어머니 김정화는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장 부대로 달려갔지만, 현장도 보존되어 있지 않았다. 부모님께 유서를 썼다고 하지만 노트북도 이미 치워진 뒤라 정말 아들이 쓴 것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당연히 부모는 군이 무엇인가 은폐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부대의 태도도 시시각각 바뀌었다. 처음 장례 준비를 할 때는 무척 친절하고 잘해주던 부대 관계자들은 아버지가 화장에 동의한다는 도장을 찍자마자 태도가 돌변했다. 당장 장례식장에 추가 음식 반입이 금지됐다. 화장 이후에도 그랬다.

"벽제 화장터에 가면 죽음에 의문이 있는 분들을 모셔 놓은 봉안소가 있어요. 그런데 가보니까 책장에 커튼 하나 쳐놨더라고요. 너무 시설이 낙후해. 안쓰러워서 우리 애는 사설 납골당으로 옮겼어요. 그랬더니 바로 부대에서 '이제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식으로 나오더라고요. 위병소 출입 기록 같은 걸 요구해도 자료 협조를 전혀 안 하기 시작했어요."(박향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는 바로 소송절차에 들어갔다. 부대는 박종우에게 과도한 양의 업무를 배정하고, 편제에도 없는 일을 시켰다. 조종사로 보직을 내고서도 조종사 기량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훈련도 시키지 않았다. 최소한 아들의 사망에 대한 부대의 책임이라도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아들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싶었다.

소송은 길었고, 결과는 참혹했다. 가장 먼저 국가를 상대로 군의 부당행위를 인정하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는 그나마 과도한 업무와 비편제 업무를 시킨 사실에 대한 부대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군대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아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라는 행정소송도 제기했다. 결론은 같았다. 마지막으로 '순직'이라도 인정하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또다시 졌다.

박종우의 부모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제 더 이상 방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박종우가 떠난 지 4년이 지난 2013년까지, 부모는 쉬지 않고 싸웠고, 완벽하게 졌다.

절망 속에서 만난 사람들  

개인택시를 몰았던 아버지 박향규는 소송을 하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할 일은 하면서 생계는 유지하고 있어야 오래 싸우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종우의 유별난 책임감은 그의 아버지를 닮은 것이 분명했다. 물론 예전 같지는 않았다. 무사고를 자랑하던 그였지만, 아들을 화장한 후 1주일 뒤, 처음으로 사고를 냈다.

"교회 가시는 부부를 태웠는데, 손님이 다 타지도 않은 상태에서 제가 후진을 해버렸어요. 손님이 넘어지면서 다리도 다치고 옷도 찢어졌어요. 너무 미안해서 나도 모르게 '아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제가 정신이 없었다', '너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그분들이 가만히 듣더니 그냥 가라더라고요. 연락처를 달라고 했더니 '연락처 주면 신경 쓰이시고 일하기 힘드실 테니까 그냥 없던 일로 생각하라'고 하시더라고요."(박향규)

자식 잃은 슬픔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박향규도 그랬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손님을 태우고 용산 국방부나 국회 앞을 지날 때면, 여러 억울한 사연으로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는 무심했지만, 이제는 갈등을 느꼈다.

"서울 곳곳을 다니니까 일인 시위하는 분들이 눈에 들어와요. 특히 국방부 앞에 가면 군에서 사망한 유가족들이 많더라고요. '아, 나도 택시 그만두고 저렇게 해야 하나?', '나도 피켓 만들어서 앞에 서 있는 게 맞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거니까, 그때까지는 마음이 힘들어도 아내와 딸을 지키자는 생각으로 버텼어요."(박향규)

재판은 다 졌지만, 부부는 일상도, 아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소송을 준비하며 모은 자료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뒀다. 그러던 중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다. 부모는 종우가 떠난 지 10년 만인 2019년 4월, 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조사 당시 소송을 준비하며 모아둔 자료가 큰 도움이 됐다. 조사 과정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국가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들어 준 것이 처음이었다. 싸움이 아니라 치유의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1년 8개월 만인 2020년 12월, 위원회는 드디어 국방부 장관에게 박종우의 사망을 순직으로 재심사할 것을 결정했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2021년 11월, 국방부도 결국 박종우의 순직을 결정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2년 만이다.

"엄청나게 울었어요. 머리에서 뭐가 쫙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어요. 우리 아들 명예를 지켰구나. 결국 진실이 밝혀지는구나. 둘이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김정화)

어머니 김정화는 국방부에서 최종 순직 결정이 내려질 때쯤,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절망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았다. 약은 먹으면 되고 아들은 명예를 되찾았으니까.

슬픔 딛고 일어선 부부의 희망 찾기
 
▲ 박종우의 친구 정우철(좌), 아버지 박향규(우) 박종우와 함께 육군항공학교에서 조종사 양성 교육을 받은 친구 정우철(사진 좌)은 박종우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박종우의 부모에게는 그가 새로운 아들이다.
ⓒ 손우정
 
오랫동안 힘겨운 싸움을 진행했지만, 슬픈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마운 인연도 많이 만났다. 소송을 준비하면서 아들의 옛 동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중 육군항공학교에서 아들과 같이 양성 교육을 받은 동년배 정우철은 내 일처럼 나서줬다. 그러다 어느새 '아들 친구'에서 '사위'가, 아니 또 다른 '아들'이 됐다.

정우철은 박종우의 하나뿐인 여동생과 2011년 결혼했다. 재판에서 철저하게 깨져나갈 때부터 최종 순직 결정을 받을 때까지, 모든 순간에 부모의 눈과 귀, 손과 발이 되어 뛰었다. 단지 장인·장모의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종우를 포함해 18명이 같이 육군항공대에서 양성 교육을 받았어요. 종우는 교육 장교같이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맡은 임무를 가장 열심히 수행했어요. 비행도 열심히 했고요. 비행하는 것 자체를 너무 좋아하던 친구였어요.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같이 교육받았던 친구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그럴 친구가 아닌데, 왜? 도대체 왜?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어요."(박종우의 친구 정우철)

정우철은 모든 소송에서 지고 난 후에도 계속 자료를 찾고 조사기록을 뒤졌다. 그러다 육군본부에서 2000년대 초반부터 비편제 직무는 배정하지 말라고 명령한 한 공문도 발견했다. 물론 그는 편제에 없는 직무도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도 본연의 업무와 연관이 있거나 희망자에 한해야 한다. 무관한 업무를, 사람을 사지로 몰아가면서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만든 누구 하나 책임지거나 처벌받지 않았다.

결국 박종우처럼 평생 조종사를 꿈꾸던 정우철은 군대를 떠나 민간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부부의 새 아들이 되어 진실규명에 나섰다. 그는 이 일을 겪으며 이것이 친구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억울한 일을 겪어본 사람은 다른 이들의 억울함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이 받은 도움처럼, 이제 그들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아들을 잃은 슬픔은 없어지지 않았지만, 이제 그들은 다시 '행복'과 '희망'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됐다.

"(아들이 떠나고) 매일 울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행복해요.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손녀와 3학년이 된 손자가 너무 밝고 잘 크는 걸 보면서 다시 희망이란 걸 가졌어요. 웃음과 삶을 되찾은 것 같아요. 애 아빠가 택시 일을 그만두면 종우가 있는 대전 현충원 옆에 와서 살 거예요. 죽을 때까지 웃으면서 아들 보러 올 거예요. 이제 소원도 다 이루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 소중해요."(김정화)

부부는 아들을 떠올리며 문득문득 눈물을 보였지만, 결국 웃음을 다시 찾았다. 처음으로 자신들의 말을 들어준 국가. 그제야 아들은 명예로운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현충원에 묻혔다.

그러나 아직 웃음을 찾지 못한 이들도 너무 많다. 여러 예방조치와 병영문화 개선이 이루어진 최근에도 군사망 사건 중 자해 사망의 비중이 60~70%를 차지한다. 2019년을 기준으로 창군 이래 전사자를 제외한 사망사고 군인 7만 4674명 중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한 군인은 3만 9436명에 이른다(이재승 외. 2020. 「자해사망 군인의 예우에 관한 외국 법제 및 적용방안 연구」. 국방부. 4~5쪽). 그나마 2012년 7월, 국방부가 순직 인정 범위를 자해 사망자까지로 확대하고, 2014년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 저하된 상태'의 자살을 순직으로 인정한 결과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 명령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닐 것이다. 박종우의 부모님처럼, 슬픔을 이기고 행복과 희망의 단어를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아픔과 원통함을 들어주는 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은 가장 먼저 국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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