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의 힘" "도둑놈들"…막장 현수막에, 내 세금 쏟아붓는다 [도 넘은 현수막 정치]

김효성, 김다영 2023. 8. 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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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서울 마포구 합정역 인근에 각 정당 현수막이 난립하고 있다. 위쪽부터 김성동 국민의힘 마포을 당협위원장, 정청래 민주당 의원, 열린민주당이 붙인 현수막 모습. 정의당 마포을 지역위원장인 장혜영 의원이 붙인 현수막(오른쪽 맨 아래)은 한쪽 끈이 풀린채 떨어져있다. 김경록 기자

#. 지난 20일부터 진보당은 전국 곳곳에 “양평고속도로 종점, 누가 변경한 건희?”라는 현수막을 붙였다. ‘거니’를 ‘건희’로 치환해 노선 변경이 김건희 여사때문에 비롯됐다고 꼬집은 것이다. 한 시민은 “‘건희’ 두 글자만 크게 썼더라. 전문 선동꾼답다”고 했다.

#. 지난 15일 발생해 14명의 사망자를 낸 ‘오송 지하차도’ 침수 사고 후 김영환 충북지사 책임론이 제기되자 국민의힘 충북도당은 “더불어민주당은 도정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현수막을 충북 지역 곳곳에 내걸었다. “슬픔에 잠긴 도민은 안중에 없고 오직 정쟁만 하냐”는 지적이 나왔다.

총선을 8개월여 앞두고 유권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정치 현수막이 넘쳐나고 있다. 내용은 혐오와 비방 위주다. 가짜뉴스에 편승하거나 인신공격성 문구도 빠지지 않는다.

지난해 12월부터 시행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에 따르면 정치 현안에 대한 입장이나 정당 정책이 담긴 현수막은 개수·문구 제한 없이 달 수 있다. ‘자유로운 정당활동을 보장한다’는 법 개정 취지 때문이다. ‘현수막 홍수’에 행정안전부는 지난 5월 스쿨존 부착 금지 등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지만, 문구 제한 규정은 없다. 지자체 선관위가 사안별로 관여하지만, 일관된 규정이 없어 “잣대가 모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경민 기자


특히 여야 지도부가 현수막을 직접 챙기면서 ‘막말 현수막’ 현상이 커지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양 극단의 정치 상황이 현수막에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거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현수막 문구를 당 사무국과 수시로 상의하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 6월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현수막 게시 현황을 각 지역위원회에서 보고받았다. 야권 관계자는 “중앙당에서 자극적인 문구의 현수막을 만들어 게시하라고 해서 지역위원장이 외려 잘 안 보이는 외진 곳에 걸었다”고 했다.

정당 현수막의 제작과 철거에는 세금이 투입된다. 정치자금법 28조에 따르면 국고보조금은 홍보용 선전비로 쓸 수 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매년 수백억 원대 보조금을 받는 거대 정당으로선 용처가 마땅치 않아 현수막에 적지 않은 돈을 지출하고 있다”라며 “문제가 되는 현수막을 떼는 지자체의 행정비용도 결국은 세금”이라고 했다.


①근거 없는 음모론 확산


현수막 음모론을 부채질하는 건 군소야당이다. 진보당은 7월 초 ‘급하게 바뀐 서울~양평고속도로, 모든 길은 김건희로 통하나’라는 현수막을 서울 종로구 당사 인근에 게시했다. 서울~양평고속도로 변경안의 양평JC 인근에 김건희 여사 일가 토지가 있다는 점을 ‘특혜’로 단정지은 것이다.
진보당이 7월 20일부터 전국에 달기 시작한 현수막. 홈페이지 캡처

열린민주당은 최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서울~양평고속국도를 휘게 한 국정농단의 힘’이라는 현수막을 여러 개 달았다. 김 여사의 얼굴을 일부 모자이크한 사진도 함께다. 이 당은 2022년 열린민주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자 이에 따르지 않은 일부 강성 당원이 창당한 ‘0석’ 정당이다. 여권 인사는 “군소정당은 자기 지지층만 챙기면 된다는 생각이 강해 일반 유권자가 거부감을 느끼는 현수막도 마구 거는 경향이 있다”며 “자극적인 구호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의도”라고 했다.


②특정인 혐오 자극


민주당 최고위원이기도 한 정청래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서울 마포을)에 ‘극우 유튜버 통일부 장관, 학폭 은폐 방통위원장’이라는 현수막을 달았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과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를 겨냥했다. 당사자의 “사실무근” 해명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열린민주당이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 부착한 현수막. 전민구 기자


윤석열 대통령 폄하성 현수막도 적지 않다. 한·일 정상회담 등과 관련해 진보당은 “나라까지 팔아먹는 영업사원” “일(日)편단심”이라는 현수막을 제작했다. 진보당 광주시당은 대선기간이던 2021년 10월 윤 대통령을 ‘윤틀러’(윤석열+히틀러)라고 지칭한 현수막을 붙이기도 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현수막 공격의 주 대상이다. 지난 2월 국민의힘은 이 대표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자 드라마 ‘더 글로리’ 대사에 빗대 “죄 지었으면 벌 받아야지”라는 현수막을 달았다.


③세지는 막말


비속어도 등장한다. 우리공화당은 지난달 중순 서울과 대구·경북 지역에 “대장동 50억 도둑놈들 잡으러 가자!”라는 현수막을 붙였다. 7월 15일 서울역 앞 태극기집회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다.
강성희 진보당 의원이 7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윤석열 대통령의 장모 최은순 씨 구속과 관련해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지역색을 부추기는 경우도 있다. 지난 4월 전북 전주을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한 당시 강성희 진보당 후보를 겨냥해 국민의힘 전주을 당원 일부는 “전주는 공산주의 해방구인가” “친일 매국노보다 우리는 간첩이 더 무섭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강 후보는 재선거에 당선돼 국회의원이 됐는데, 최근 강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에 “일본의힘이 진짜 반국가세력”이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도 넘은 막말과 수준 낮은 문구의 현수막이 정치 혐오만 부추기고 있다”며 “특히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 목을 맬수록 중앙당의 자극적인 현수막을 무조건적으로 달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현수막이 공해와 폐해로 전락하고 있다면 차라리 ‘현수막 백지화’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김효성·김다영 기자 kim.hyos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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