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불쉿잡’ 증후군
직무가 중요할수록, 그래서 그 직무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을 때 사회적 타격이 클수록 담당자 직급은 낮고, 권한은 작으며, 뒤따르는 처벌은 막대하다. 반면 직급이 높을수록 그들의 책임과 의무는 모호하고 추상적이어서 하나 마나 한 얘기들로 채워져 있고, 그런 이유로 일이 잘못됐을 때 문책을 받는 일이 드물며, 같은 이유로 그들이 일을 안한대도 사회적 불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헌정사상 최초라는 국무위원 탄핵 사태가 확인시켜준 건 정확히 이런 현실, 이 정부 고위직의 무용함과 아무도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 우리 관료제의 이상한 위계질서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심판 기각 후 여권에선 ‘167일간의 안전공백’을 초래했다며 야권을 비판했지만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읽어보면 정반대 인상을 받게 된다. 인파사고든, 자연재해든 재난을 예방·구조·수습하는 데 장관이 하는 일은 사실상 없다는 것. 어차피 의미 있는 일은 전부 현장 몫이고, 책임도 현장이 질 것이며, 따라서 서울 압구정동에 사는 장관이 경기 일산에 사는 수행비서 관용차를 기다리느라 현장지휘소에 105분 늦게 도착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건 없다는 것. 이태원 참사 후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져라 그거는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던 대통령 말 그대로. ‘재난대응의 미흡함’에 대해 장관 책임을 묻는 건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뜻밖에 현실을 가장 잘 아는 건 고위직 본인들인 거 같다. 그들이 안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하면 그들이 솔직하게 인정한 덕분이다. 참사 때마다 대통령 주변에서 나온 발언들, 이를테면 “한국 대통령이 당장 서울로 뛰어가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는 입장”(대통령실 관계자)이라거나 “거기에 (일찍) 갔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은 없다”(김영환 충북도지사) “그 시간은 이미 골든타임이 지난 시각”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이상민 장관) 같은 말들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동일한 태도를 기반으로 한다. “무의미하고 불필요해서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려운 직업 형태”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정의 내린 ‘불쉿잡’이라면 이 정부 고위직들이 일종의 불쉿잡 증후군에 집단적으로 시달린다고 봐야 할까.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오송 지하차도 참사로 수사 의뢰된 공무원 60% 이상이 하위직이고, 인사 조처가 건의된 5명에 충북 행정부지사와 청주시 부시장은 포함되는데 충북지사와 청주시장은 빠지는 일은 더없이 자연스러워진다. 이태원 참사라고 다를까. 서울 용산경찰서와 용산소방서는 수사와 재판으로 쑥대밭이 됐지만 서울시장·행안부 장관·경찰청장은 무혐의 처분을 받고 자리를 지켰다. “일의 사회적 가치가 경제적 가치와 반비례할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을 도덕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불쉿잡’ 인용)는 한탄처럼 의미 있는 업무를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욕당하고 처벌받는 게 당연한 일이 돼버렸다.
정부만의 문제도 아니다. 과도한 학부모 민원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초등교사 사건으로 들끓는 학교 현장에서 교장의 역할을 묻는 글(‘놀라운 사실, 난리 난 학교에 교장이 안 보인다’)을 봤다. 보스는 감독만 하고 책임은 실무자가 지는 거라는 태도는 학교에도 있다. 이게 바뀌어야 해법이 나온다. 책임자가 책임지도록 만들지 않으면 자칫 모든 해법이 감독관과 위원회를 늘리는 것으로 귀결되고, 정작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설물을 보수하고 교통을 통제하는 ‘진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 적은 보상으로, 더 많은 업무를, 더 큰 책임을 진 채 떠맡는 마법이 벌어질 수 있다. 정신 바짝 차릴 일이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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