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나의 행복한 북카페] 역사적 진실, 왜곡된 기억
지중해 크레타섬에 도착해 크노소스 궁전 앞에 서면 경외감에 압도된다. 4000년 전 지중해 최고 선진문명이었던 미노스 문명의 평화와 번영, 과학과 예술에 빠져든다. 1000개가 넘는 방에 화려한 예술장식, 이를 처음 보는 ‘변방 후진국’ 그리스인에겐 미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스의 시조 테세우스가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영웅의 ‘신화’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반칙왕’ 테세우스가 미노스왕의 철없는 어린 딸을 속여 미노스왕을 죽이고 찬란한 문명을 야만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그리스 소년을 잡아먹는다는 괴물은 사실은 올림픽의 원형, 체전의 황소 넘기 경기였다. 왕비가 짐승과 수간했다는 비열한 오명 씌우기는 근·현대 역사에도 반복된다. 1900년경 고고학자 A 에반스가 궁터를 발견, 복원하지 못했더라면 미노스의 명예회복은 영원히 불가능했으리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기억』(2020)은 “세계는 지금 기억상실을 앓고 있다”며 우리가 믿는 것과 진실의 간극을 보여준다.
가끔은 역사가 그 스스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칭기즈칸은 파괴와 살육의 악마로만 그려졌었다. 칭기즈칸이 쓴 역사책은 명나라가 건국하며 모두 파괴돼 이후 인류는 칭기즈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19세기 홀연히 나타난 한 사본(‘몽골비사’)이 극적으로 발견됐고, 1980년대 이후 해독됐다. 『칭기즈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잭 웨더포드, 2005)에서 칭기즈칸은 혁신의 아이콘이자 서구보다 500년 앞선 열린 사회를 만든 선각자였다. 근대 유럽사회의 기틀이 되는 교육, 금융, 우편, 양성평등, 해양진출 등을 만들었다.
역사는 그 상황을 보고 겪은 세대, 전해 들은 세대, 보도 듣도 못한 세대로 이어지며 기억이 지워진다. 50년이면 앞선 두 세대는 가고, 보도 듣도 못한 세대만 남아 왜곡된 기억이 영생을 얻어 1000년을 간다.
이안나 성형외과 전문의·서점 ‘채그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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