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살인 사건 이후 '설마 내가' 하는 마음을 버렸다

송혜림 2023. 7. 3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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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용품 구입하는 친구들... 당신의 안전이 나의 안전, 안전의 연대가 필요하다

[송혜림 기자]

 신림동 살인 사건 엿새 후인 27일 오전, 사건 발생 장소 인근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 국화와 추모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
ⓒ 소중한
 
서울 한복판에서 사람이 죽었다. 젊은 청년이었다. 집을 알아보려고 부동산에 들렀다가 흉기에 맞았다. 피해자는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의 일생이 담긴 기사를 보고 울고 또 울었다. 그가 미처 살지 못한 삶이 안타까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지나갔던 길은 어제의 내가 걷던 곳이었다. 친구와 저녁을 먹고 시덥지 않은 농담을 건네며 걸었던 길이었다. 그 길 위엔 일상이 있었다. 누군가는 간판 등을 켜고, 누군가는 출퇴근을 했으며, 누군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걸었다. 서울 시민들의 소중한 하루가 흐르던 곳이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칼부림으로 모든 게 산산조각 나버렸다. 일상이 머물던 거리엔 공포의 흔적만이 남아 버렸다. 과연 '신림'만 일까. 우린 이제 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안전을 불신하게 됐다. 

'설마 내가' 하는 마음을 버렸다
 
▲ 호신용 스프레이 작은 마카펜 크기의 스프레이. 쉽게 분사가 가능하다.
ⓒ 송혜림
 
퇴근 후 대학생 때 쓰던 가방을 옷장 구석에서 꺼냈다. 잡동사니로 가득 찬 가방 속을 뒤지다 마카펜 크기의 작은 블루 스프레이를 찾아냈다. 몇 년 전, 섬 지역으로 혼자 여행갔을 때 혹시 몰라 온라인으로 구매해 놓았던 호신용품이었다. 물론 한 번도 써 본 적은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 스프레이를 자주 사용하던 가방 끈에 달았다. 유광이라 그런지 빛을 받으면 액세서리처럼 반짝하고 빛났다. 이렇게 조그만한 게 나를 위험에서 구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섬찟했다. 

지금껏 이 스프레이를 가방에 달지 않은 이유는 혹시나 '예민한 사람'으로 비춰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호신용품을 지니고 다니는 것 자체가 흔치는 않으니 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역시 '안전 불감증'이었다. '설마 내가 길거리에서 위험한 사람을 만나거나 그런 상황에 처해지게 될까'. 그런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 어떤 이유를 들어 잣대를 두기엔, 나의 안전할 시간이 더 지연될 뿐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마냥 기다리기엔, 내가 먼저 나를 지켜야 했다. 

오랜 친구들의 단톡방에 스프레이 사진을 올리니 몇몇 친구들의 놀라운 반응이 이어졌다. 한 친구는 어젯밤 삼단봉을 구매했단다. 원래 크기는 두 뼘 정도 되는데 펼치면 곤봉처럼 길어진단다. 하나는 자신이 갖고, 다른 하나는 여동생을 준다고 했다. 사용할 줄은 아냐는 질문에 '그냥 휘두르다 보면 어떻게든 맞지 않을까'란 농담어린 답이 돌아왔다. 

다른 친구는 밤새 마땅한 호신용 스프레이를 찾다가 잠들었다고 했다. 구매하는 김에 친구들에게도 선물로 주려고 심사숙고해 고르는 중이라고 했다. 그 친구는 공무원 준비생이었다. 매일 새벽 독서실에서 나와 걷던 고요한 밤길이 좋다던 그녀는 신림역 사건 이후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우리는 괜찮아 보이는 호신용품 판매 페이지를 공유했고, 호신술이 담긴 유튜브 영상들을 함께 시청했다. 사건사고와 관련된 기사는 되도록 공유하지 않으려 애썼다. 공포로 시작해 공포로 끝나는 대화를 멈추고 싶었다.

'안전의 연대'가 필요하다
 
 신림동 살인 사건 엿새 후인 27일 오전, 사건 발생 인근 사거리를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 소중한
 
며칠 뒤, 호신용 스프레이를 처음으로 가방에 매달고 퇴근하던 2호선 지하철. 신림역에 멈추자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하차했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걸음을 가만히 응시했다. 문득, 당신의 안전이 나의 안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닌 스프레이가 나를 지키고 당신을 지킬 수 있듯.

출근길 지하철에서 탄 정장 입은 청년들. 햇빛 아래 아이스크림을 들고 뛰어 다니는 아이들. 공원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비를 구경하는 할머니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그 수많은 얼굴들. 슬픔을 겪어도, 옅은 두려움을 안고, 다시금 일상을 살아내야만 하는 우리들. 

우리에겐 이제 '안전의 연대'가 필요하다. 피해자를 위해 추모하고, 또 다른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더 이상 제 2의 신림역이 생겨나질 않기를, 안전이란 공간이 더는 위협받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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