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총성, 이탈리아 마지막 왕세자의 황당한 변명
[김형욱 기자]
▲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왕이 될 수 없는 왕자> 포스터. |
ⓒ 넷플릭스 |
1978년 8월 18일 새벽, 프랑스령 코르시카 인근 카발로섬에서 총성이 울린다. 어둠 속에서 울린 총성의 당사자는 명백했다. 당시 40대 초반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가 홧김에 쏜 총에 19살 청년 디르크 하머가 맞고 말았다. 비토리오는 구속되어 프랑스 아직시오 교도소로 갔고, 디르크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별안간 이게 무슨 일인가? 비토리오는 누구이고 또 디르크는 누구인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왕이 될 수 없는 왕자>는 비토리오에 의한 디르트 살인 사건의 전모를 다룬다. 아울러 비토리오가 누구인지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려진 사실보다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우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는 1946년 6월 12일 공식적으로 사라진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움베르토 2세의 아들이다. 왕정 폐지 이후 왕가 일족은 이집트를 거쳐 스위스에 터를 잡았다.
한편, 디르크 하머는 카발로섬에 보트 여행을 온 일행 중 비르기트 하머의 남동생이었다. 비록 일행보다 몇 살 어렸지만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생각해 보면 굳이 오지 않아도 될 여행에 따라와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때가 1978년 8월 17일이고,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간에 비토리오가 나타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다짜고짜 총을 쏴댔다. 비토리오는 카발로섬을 자신의 땅으로 생각했고 외지인이 대거 몰려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걸 못마땅히 여겼다.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왕세자가 벌인 사건 이후
우발적이든 고의적이든 사건은 발생해 버렸다. 그런데 비토리오는 감옥에 갇힌 지 두 달도 채 안 된 1978년 10월 6일에 전격적으로 조건부 석방이 이뤄진다. 중죄 법원으로 갔을 시, 디르크가 살아나면 10년형이었고 디르크가 죽으면 20년형이었을 텐데 말이다. 반면 사건이 있은 지 4달이 채 안 된 1978년 12월 7일에 디르크가 사망하고 만다.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이었다. 남동생의 죽음을 접한 비르기트는 비토리오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을 다짐한다.
비토리오는 가석방 후 스위스로 거처를 옮긴다. 프랑스 사법부는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는 모양새였고 기자들도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못했다. 비르기트를 비롯한 디르크의 가족은 그럴수록 더 적극적으로 카발로 사건의 수사를 요구했다. 비토리오 자신이 이미 사건에 법적 책임이 있음을 시인했던 만큼 수사에 걸림돌은 없었다. 물론 비토리오는 우발적이고 또 우연에 의한 사건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잘못은 없다고 못 박았지만 말이다. 그런가 하면 사건 당시 목격자들인 비르기트의 친구들은 비토리오를 상대하는 게 두려웠다.
이후 사건 관계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받는다. 디르크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암에 걸렸다가 대체 요법을 발명했고, 사보이아가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큰 금액을 요구했다고 한다. 디르크의 아버지는 결국 독일 대사관을 통해 사보이아가와 접촉한 후 돈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비토리오는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총잡이 왕자'라고 불렸다. 한편 비르기트는 파리로 건너가 모델 일을 하며 언론과 접촉해 프랑스 사법부를 의심하는 말을 남겼다. 이후 사건은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까?
사건 후 비토리오는 어떻게 했어야 했나?
갑자기 비토리오의 유죄 인정 확인서가 철회되더니 문서가 사라진다. 언뜻 믿기 힘든 상황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편 비토리오는 모델 마리아와 결혼했다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다시피 재산도 빼앗긴 후 무기 거래로 큰돈을 만진다. 그런 와중에 프랑스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사회 초고위층과 친분을 쌓는다. 비르기트가 우연히 교회 헌장식에서 만난 마리아의 뺨을 때리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비르기트는 청렴하고 실력 있는 변호사 한 명을 소개받는다. 그녀의 이름은 사빈 포감, 비르기트에게 큰 힘이 된다. 결국 사건 발생 13년 만인 1991년 11월 13일 비토리오는 프랑스 중죄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루이 16세가 재판을 받고 단두대로 끌려가 처형당한 바로 그 악명 높은 법정에 말이다. 비토리오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고, 비르기트로선 절체절명의 기회였다.
이쯤에서 돌아보자. 비토리오는 어떻게 했어야 했나? 그가 고의로 디르크를 저격한 건 아닌 것 같다. 그의 주장대로 위협 또는 실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잘못이 아닌가? 명백한 그의 잘못이다. 최소한 진정 어린 사과를 하고 잘못을 인정하되, 당연히 자기변호는 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제3자가 말하듯 고인의 죽음이 안타깝다고 했고 자기 잘못이 아니며 고로 자기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급기야 탄환 조사를 하더니 뒤늦게 자기가 쏜 총에 디르크가 죽은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무슨... 그런데 위협사격은 의도적인 게 아닌가?
비토리오는 무혐의 처리를 받았지만 잘못했다
비토리오 측은 비열한 변호 전략을 채택한다. 현장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을 데려와 증인으로 발언하게 해, 비토리오가 얼마나 성실한지 퍼뜨리고 그러니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식으로 몰아가 법정의 여론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결국 유죄 판결은 났지만, 의도적이지 않았고 비토리오가 디르크를 살해하지 않았으며 면허 소지를 하지 않은 군용 소총을 쐈다는 결론 하에 집행유예 5개월을 선고받는다.
2002년 12월 23일 비토리오 가족은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56년 만의 귀국이었다. 왕의 귀환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몇 년 되지 않은 2006년, 비토리오는 뇌물 수수와 성매매 공모죄로 체포된다. 무혐의로 풀려나지만, 감옥에서 동료에게 카발라섬 사건을 발설한다. 웃으며 살인을 인정했는데 도청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토리오는 언론이 맥락을 벗어나 악의적으로 편집했다고 변명한다.
2011년에는 비르기트가 녹화 영상을 찾아냈지만 변한 건 없었다. 비토리오는 기억이 나지 않고 조작되었다고 변명했다. 결국 비토리오가 녹화 영상을 공개한 비르기트와 신문사를 고발했지만, 그들은 최종 무혐의 처리를 받았다. 비르기트는 승리했다고 자평한다. 비토리오가 1978년 8월의 카발라섬 사건 이후 수십 년 동안 언론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한 걸 승리라고 자평할 순 있겠으나, 그가 카발로섬 사건에 관한 모든 혐의로부터 달아났기에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이유로 사건이 터질지 모른다. 억울한 건 피해를 입은 사람일 것이다. 가해자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저 진정 어린 사과부터 해야 할 뿐이다. 비토리오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어느 누가 그에게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에겐 수많은 크고 작은 잘못이 있고 그중 카발로섬 사건에서의 잘못이 가장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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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 개인 블로그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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