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증샷’ 찍듯 선조들도 남겼다, 특별한 순간 그린 83점 한자리
10폭 병풍의 중앙인 5폭에서도 가운데쯤. 수많은 인파가 모인 경운궁(옛 덕수궁) 흥덕전에서 사모에 녹색 관복을 입은 화가가 붓을 들어 붉은 용포 차림의 태조 이성계를 화폭에 담고 있다. 바로 옆에서 면류관을 쓴 고종과 순종이 지켜보고 있다. 때는 1900년, 화가는 당시 50세의 채용신(1850~1941)이다. 3년 전인 1897년 아관파천을 끝낸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즉위했고 정통성 확립 차원에서 이성계 어진(御眞)을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키로 했다.
당시 전주에서 화원으로 활동하던 채용신이 왕의 부름을 받았다. 평생 화업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을테고, 그는 이 기억을 훗날 ‘평생도’라는 10폭 병풍으로 남겼다. 원래 18세기 말, 19세기 세도가들이 부와 영예가 자손 대대로 지속하길 바라면서 일생의 중요 순간들을 화가로 하여금 그리게 한 게 평생도다. 지금처럼 카메라나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인증샷’을 남겼겠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인생 늘그막에 회고하며 주문 제작했다. 채용신의 평생도가 특이한 것은 화가가 직접 자신의 일생을 남겼다는 점이다. 혼례, 초임지 부임 등 인생의 10장면을 담은 이 그림엔 뛰어난 초상화가답게 간략하게 특징을 잡은 그 자신의 얼굴이 뚜렷하다.
채용신의 평생도를 포함해 조선 후기 문인·화가들이 ‘결정적 장면’들을 기념한 회화 31건 83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내달 1일부터 열리는 ‘아주 특별한 순간-그림으로 남기다’ 특별전이다. 마침 이날부터 10일까지 전북 새만금에서 세계 청소년들의 축제인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열린다. 31일 개막식에서 만난 장진아 학예연구실장은 “4년에 한번인 스카우트잼버리가 한국에서 열리는 것은 32년만이고, 참가자들이 전주박물관도 방문해 문화체험할 예정이라 만남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했다”고 말했다.
‘아주 특별한 만남’을 주제로 한 1부에선 조선 후기 중인·문인들이 ‘아집(雅集)’, ‘아회(雅會)’라는 이름으로 취미를 공유하거나 일상을 함께 즐겼던 문화가 화폭에 비친다. 요즘 말로 ‘인싸’들의 모임도 포착된다. 어느 화창한 봄날의 풍류를 담은 ‘균와아집도’(1763)에는 경기도 안산을 기반으로 활동한 18세기 대표 화가들이 한데 모였다. 허필(당시 56세)의 발문에 따르면 해당 그림도 강세황(51세)이 구도를 잡고, 인물은 김홍도(19세)가, 소나무와 바위는 심사정(58세)이 그렸고 채색은 최북(52세)이 담당했다고 한다. 각자 장기를 발휘해 요즘 말로 ‘컬래버레이션’ 한 셈이다.
2부는 자연 속 특별한 순간들을, 3부는 특별한 행사들을 소개한다. 왕세자의 탄생도, 평안감사향연도 등이 소개되는 3부의 사실상 주인공은 채용신이다.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문화유산 중 ‘채용신 초상화’ 3점이 나란히 선보인다. 대략 1910~1920년대 작품들로 ‘송시열 초상’ ‘고종 어진’ 등 주인공 이름으로 불리는 관례와 달리 누구를 그렸든 ‘채용신 초상’으로 통용된다는 점이 이채롭다. 20세기 들어 초상화가 대중화되면서 전문화가의 명성이 주인공을 능가하게 됐고, 이 선두에 채용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920년대 그린 초상화에선 눈동자에 빛이 반사된 흰 점이 나타나는 등 서양화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전시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평생도 역시 이건희 컬렉션에서 왔다. 화면 상단의 궁궐 담장 뒤쪽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공사관기가 휘날리고 있다. 하단엔 서양식 검정색 군복을 입은 조선 신식 군대 뿐 아니라 당시 경운궁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도 같이 그려졌다. 화가에겐 조선 창업주 어진을 모사하는 감격적인 날이지만, 열강에 휘둘리던 어수선한 시절을 환기시키는 기록화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풍경 사진, ‘먹방’ 사진도 훗날 이 시대를 반추해줄 기록이 될지 모른다. 전시는 10월29일까지.
전주=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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