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의 허송세월과 한국 여자축구의 민낯

이준목 2023. 7. 3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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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약체 모로코와의 2차전, 0-1로 무너져... 한국 여자축구계에 미칠 악영향 우려

[이준목 기자]

'사상 첫 8강 도전'이라는 근거없는 기대에 부풀어있던 한국 여자축구의 몽상이 처참하게 박살나는데는 딱 두 경기면 충분했다.

콜린 벨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한국여자축구대표팀이 '2023 호주·뉴질랜드 FIFA(국제축구연맹) 여자 월드컵' 조별리그 H조에서 충격의 2연패에 빠졌다. 1차전에서 콜롬비아에 0-2로 무너졌던 한국은, 30일 최약체로 예상된 모로코와의 2차전에서도 0-1로 무너졌다. 본선 첫 출전국인 모로코는 한국을 상대로 역사적인 월드컵 첫 골과 첫 승점-승리를 따냈다.

이로써 한국은 각 조 4개국 중 1·2위에 주어지는 16강 진출이 사실상 멀어졌다. 한국이 오는 8월 3일 맞붙게 될 조별리그 최종 3차전 상대는 FIFA 랭킹 2위의 강호 독일이다. 현재 독일은 모로코를 6-0으로 이겼으나 콜롬비아에 1-2로 덜미를 잡혔다. 한국이 16강에 진출하려면 독일을 5골차 이상으로 이기고, 콜롬비아가 모로코까지 잡아줘야만 한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한국의 경기력이나 독일과의 전력차를 감안할 때 기적에 가까운 도전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참사다. 대회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지금까지 결과물만 놓고봐도 이번 월드컵은 한국축구에 두고두고 뼈아픈 흑역사로 남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한국 여자축구는 2003년 여자월드컵 본선에 처음 진출한 이래 이번 대회가 통산 4번째이자, 3회 연속(2015년·2019년·2023년) 출전이었다. 한국축구의 월드컵 첫 승과 최고 성적은 2015년 캐나다 대회에서 달성한 16강이었다. 2019년 프랑스 대회에서 조별리그 3전 전패로 무기력하게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던 대표팀은, 최초의 외국인 사령탑인 영국 출신의 콜린 벨 감독을 영입하며 4년간 꾸준히 담금질을 이어왔다.

한국축구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역대 최고 성적인 8강 진출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자신감의 원천은 2019년 이후 벨 감독 체제에서 긴 시간 뚜렷한 방향성과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 월드컵을 준비해왔다는 믿음이었다. 벨 감독은 특유의 고강도 훈련과 다양한 대륙별 국가들과의 평가전을 통하여 선수들을 조련해왔다.

이번 대회 한국 대표팀의 최종명단 23명 가운데 14명이 월드컵 출전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지소연, 조소현, 임선주, 박은선, 김혜리 등 2010년 20세 이하(U-20) 여자 월드컵 3위, 2010년 17세 이하(U-17) 여자 월드컵 우승 주역 출신들이 주축이 된 '황금세대'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다.

당초 한국의 이번 대회 전략은 독일이 조 1위를 차지하고 모로코가 최약체라는 전제 하에 콜롬비아와의 남은 조 2위 티켓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였다. 콜롬비아에 이기거나 최소한 비기고, 모로코를 잡아서 최종전에서 독일을 만나기 전에 가급적 16강행을 조기에 확정하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한국의 전략은 첫 경기부터 처참하게 무너졌다. 가장 중요했던 콜롬비아와의 1차전에서 한국은 예상치못한 PK 허용으로 인한 선제실점에 이어, 골키퍼 실수로 인한 추가실점까지 더해지며 맥없이 무너졌다. 또한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던 모로코전에서는 경기 주도권을 잡고도 극악의 골결정력 난조를 드러내며 또다시 자멸했다.

콜롬비아와 모로코전을 살펴보면 피지컬 열세→실책으로 인한 실점→자신감 하락→체력 저하와 골결정력 실종으로 인한 뒷심 부족이라는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콜롬비아전에서 한국은 상대의 우월한 몸싸움과 스피드에 알고도 당했다. 한국 여자축구가 지난 4번의 월드컵을 나가면서 고질적인 약점으로 지목되는 문제가 체격이 좋은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 선수들을 만나면 피지컬 싸움에서부터 밀려 나가 떨어지면서 위축되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나마 이번 대회는 약점을 정확히 알고 나름 잘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에 축구팬들은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멘탈이나 기술적으로 상대보다 나았던 것도 아니다. 콜롬비아전에서 그래도 전반중반까지는 그럭저럭 경기를 잘 풀어갔으나 선제 실점 허용 이후로는 전혀 다른 팀이 되어버렸다. 특히 두 번째 실점은 사실상 골키퍼의 자책골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모로코전은 사실상 콜롬비아전의 연장선상이었다. 이전 경기를 패배하거나 앞선 상황에서 실수를 했더라도 빨리 추스르고 다음 경기에 집중하는게 강팀의 조건이다. 하지만 콜롬비아전 전반 2실점 이후 고스란히 드러난 한국대표팀의 '멘탈 붕괴'는 모로코전까지도 전혀 회복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상대가 최약체이다보니 겉보기에 경기 주도권은 한국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인 경기력은 오히려 콜롬비아전보다 더 나빴다. 또다시 선제실점에 조급해진 선수들은 시야가 좁아져 무리한 드리블이나 불필요한 횡-백패스를 남발했고, 공격진은 무의미한 슈팅을 14개나 난사하고도 유효슈팅은 전무했다. 3전 전패를 기록했던 2019년보다도 더 퇴보한 경기력은, 대체 '4년간 뭘 준비했나'는 이야기가 나올만큼 처참했다.

어쩌면 오랫동안 황금세대라는 허울좋은 환상에 가려진 한국축구의 민낯이 드러난 결과였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평균 연령은 28.9세로 본선 32개국 중 최고령이었다. 그만큼 세대교체가 되지 않았고 주전들의 4년전보다 나이를 더 먹은 것을 감안하면 신체능력은 더 퇴보한 결과였다.

벨 감독도 이를 알고 고강도 훈련을 강조하며 체격적 열세를 만회해 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벨 감독은 대회 개막 직전 인터뷰에서 "우리 선수들이 원래 갖고 있던 수준에 비하면 최대한 체력을 올릴 수 있는 수준까지는 최선을 다했다"고 평하면서도 "선수들이 처음부터 갖고 있는 체격조건이 우수할수록 더 많은 걸 이뤄낼 수 있다"면서 한국 선수들의 피지컬에 대한 아쉬움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그리고 벨 감독의 우려는 결과적으로 현실이 됐다.

물론 벨 감독 역시 사령탑으로서 부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벨 감독은 2연패 이후 한국축구의 현실에 쓴 소리를 하며 "이것이 월드컵이다. 이것이 국제적인 여자축구의 수준이고 현실"이라고 작심발언했다. 하지만 4년간이나 장기간 팀을 지휘해놓고 이제와서 본인의 책임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그저 선수들의 실력이나 한국축구의 구조적 문제로만 돌리려고 하는 것은 '책임전가'라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 대회의 실패가 이후의 한국 여자축구계에 미칠 악영향이다. 최근 생활 체육 쪽에서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축구 자체를 전문직업으로 하는 여자축구계의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한축구협회 자료에 따르면 2023년 5월 기준 축구협회에 등록된 여자 선수는 1510명으로 9년 전인 2014년의 1765명보다 오히려 200명 이상 감소했다. 특히 여자축구의 미래가 되어야할 유소녀 선수자원은 감소세가 더 가파른 실정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여자축구리그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나 처우가 세계 기준(1만4천달러,약 1790만원)과 비교하여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저출산 사회에 접어들며 남자축구에 비하여 훨씬 낮은 위상과 인지도, 짧은 선수수명, 선수 은퇴 이후로의 축구계 진로가 불안정한 직업 생태계 등으로 인하여, 실절적으로 여성 스포츠 유망주들을 엘리트 스포츠권까지 유입하게 만들만한 매력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다.

축구계는 이번 월드컵에서 콜린 벨 감독이 이끄는 여자대표팀의 선전을 통하여 여자축구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고, WK리그를 비롯한 축구계 전체로 이어지는 낙수효과를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월드컵의 처참한 경기력으로 오히려 '세계 수준과 거리가 멀고,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희박한 여자축구'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만 팬들에게 각인될 것이 우려된다.

인프라가 열악한데 대표팀에게 성적만 요구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대표팀의 부진한 성적으로 인하여 인프라를 더욱 위축시키는 악순환인 셈이다. 과연 위태로운 한국 여자축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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