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노인은 자살, 여학생들은 몸 판다"…北 또 황당 인권 역공

박현주 2023. 7. 3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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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의 실업 사태가 얼마나 심각하면 《당신은 해고되지 않았습니까?》라는 말이 인사말로 통용되고 있겠는가"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평양출판사가 "한국의 인권 상황은 세계 최악"이라며 지난 21일 발간한 대남 비방용 책자 '인권동토대'의 한 대목이다. 국내 일각의 음모론도 여과 없이 기술됐는데, 통일부는 "북한이 얼마나 국제사회 기준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평양출판사가 지난 21일 발간한 '인권동토대' 표지 및 머리말. 보고서 캡처.


韓 따라 해봤지만…


이날 공개된 북한의 인권동토대는 98쪽 분량으로 지난 3월 한국 정부 차원에서 최초로 발간한 북한인권보고서에 대한 맞대응 성격으로 보인다.

인권동토대는 '여지없이 말살되는 사회정치적권리', '무참히 짓밟히는 경제문화적권리' 등 4개의 세부 목차로 이뤄졌다. 이는 '시민적·정치적 권리',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 등 국제 인권 규약에 입각한 순서로 이뤄진 한국 정부의 북한인권보고서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 보고서는 2017년 이후 북한이탈주민 508명의 증언을 기반으로 작성한 데 반해 북한의 인권동토대에는 직접 수집한 증언이 단 한 건도 실리지 않았다. 정부 보고서는 진술자의 성별, 탈북 연도, 탈북 시 연령, 탈북 전 거주지까지 상세하게 밝혀 신빙성을 높였다.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평양출판사가 지난 21일 발간한 '인권동토대' 목차. 보고서 캡처.


황당 지적 투성이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한국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임의적으로 짜깁기했다. 부정확한 통계와 각종 음모론도 눈에 띄었다.

일례로 북한은 "윤석열 역도가 집권한 후 실업자 수는 근 58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실업자는 80만 7000명으로 15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통계청 관계자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근거 없는 수치"라고 반박했다.

이외에도 "(한국의) 노인들은 얼른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난다면서 자식과 사회를 원망하며 자살의 길을 택하고 있다", "(한국) 대학생들의 88% 정도가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로 불리우는 방과 후 노동을 하고 있고, (심)지어 여학생들은 몸까지 팔고 있다고 한다" 등 극단적 일부 사례를 일반화한 비방이 이어졌다.

지난 5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통일문화행사 시민들이 북한 인권 침해 실상을 알리는 전시물을 관람하는 모습. 뉴스1.


이와 관련,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은 31일 정례브리핑에서 "선전 매체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면서도 "북한이 현재 국제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기준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이 3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례브리핑을 하는 모습. 뉴스1.


주한미군 깎아내리기


한ㆍ미 동맹 갈라치기를 시도하는 듯한 대목도 있었다. 북한은 한ㆍ미 상호방위조약 4조를 거론하며 "남조선의 영토 주권은 미국에 완전히 넘어갔고 미국이 군사전략상 필요한 곳이라면 아무런 제한 없이 빼앗아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있어 남조선 주민은 물가의 오리, 산속의 꿩, 들쥐에 지나지 않고, 여성은 한갖 성노리개일 따름"이라고 했다. 4조는 "미합중국의 육군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비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수락한다"고 주한미군 주둔의 근거를 규정하고 있는데, 미국이 임의로 한국 영토를 빼앗은 것처럼 억지를 부린 것이다.

한편 북한은 한국 군대 내 성폭력 문제를 지적하면서 "오죽하면 유엔인권이사회가 나서서 '남조선군내 성폭력을 예방하고 인권을 증진하라'고 권고했겠는가"라고 언급했다.

그간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채택된 북한인권결의에 대해 "허위와 날조로 일관된 협잡문서"라며 맹비난하던 북한이 이번엔 유엔의 권위를 빌려 대남 비방에 활용한 셈이다.

지난 27일 북한이 '전승절'이라고 주장하는 6ㆍ25전쟁 정전협정체결일 계기 열병식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국가가 나오자 눈물을 흘리는 모습. 조선중앙TV. 연합뉴스.


오경섭 통일연구원 기획조정실장은 "북한이 유엔의 인권 모니터링 결과를 취사 선택해 대남 공세에 활용했다는 건 역설적으로 유엔의 지적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인권동토대는 사실관계에 기초하지 않고 한국 사회 일각의 병폐를 과대 포장한 내용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근본' 역공세 재개했나


북한은 앞서 2013~2017년에도 '남조선인권대책협회'를 앞세워 관영 매체를 동원한 대남 비방에 열을 올렸다. '조선인권유린 조사통보', '남조선 인권백서' 등 보고서를 내고 한국 사회의 비극인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을 가리켜 "참혹한 인권유린 참사"라고 비난하는 식이었다.
2013년 8월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의 마이클 커비 위원장(가운데), 마주키 다루스만(왼쪽), 소냐 비제르코(오른쪽)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당시 북한의 무분별한 공세는 유엔이 2013년부터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북한 인권 실태 조사에 착수했던 시기와도 맞물린다. COI는 이듬해인 2014년 2월 최종 보고서를 통해 북한 내 인권 유린을 "반인도범죄"로 규정하면서 "북한 당국에 의해 조직적이고 광범위하며 심각한 인권 침해가 자행됐다"고 지적했다.

이에 북한은 같은 해 9월 조선인권협회보고서를 내고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왜곡된 견해가 유포되고 있다"며 반박에 나섰다. 인권 지적을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북한이 내부 동요를 막기 위해 필사적인 역공에 나선 것이다.

이번에 북한이 인권동토대를 발간하며 정제되지 않은 주장을 토해내는 것도 최근 국제사회의 인권 압박을 그만큼 아프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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