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주의 신학자들의 놀라운 주장 "예수님이 결혼 안 했으니..."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아돌프 히틀러 |
ⓒ 공용 위키 |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낡은 신분제도인 신라 골품제를 깨는 데는 기여했지만, 비상식적인 우상화 작업으로 자신의 기반을 스스로 약화시켰다. <삼국사기> 궁예열전는 권력의 절정기에 달한 궁예가 "자칭 미륵불이라 하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 방포(方袍)를 걸쳤다"고 말한다.
금관과 승복 차림으로 미륵불을 자처하는 궁예는 거리를 행차할 때도 장엄한 광경을 연출했다. 깃발, 일산(양산), 향과 꽃을 든 젊은 여성과 남성들이 앞에 서고 승려 200여 명이 뒤따르면서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삼국사기>에 묘사된 이 장면보다 훨씬 우스꽝스러운 일이 일본의 히로히토와 그 동맹자인 독일 히틀러에게서 나타났다. 궁예의 경우와 달리, 이들이 벌인 일은 인류 역사에 전대미문의 부정적 파급력을 끼쳤다. 이들은 우상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궁예와 비슷하지만, 전 세계 인류를 불행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궁예와 차원을 달리했다.
전쟁 패망 3개월 보름 뒤인 1946년 1월 1일, 나루히토 현 일왕(천황)의 할아버지인 히로히토 일왕은 흔히 '인간선언'으로 불리는 '신일본 건설에 관한 조서'를 발표했다. 조서에서 그는 "짐과 너희 국민들 간의 결합은 시종일관 상호신뢰 및 경애로 둘러싸이는 것이지, 단순히 신화와 전설에 의해 생기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천황을 현어신(現御神)으로 하고 또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라 하고 나아가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졌다고 하는 가공의 개념에 기초한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자신과 일본 국민의 관계는 신화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 아니며, 자기를 신으로 설정하는 가공의 관념에 기초한 것도 아니라고 인정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자기가 신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자기가 신이라는 전제하에 세계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자 대대적인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대중을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에 동원했던 이전 모습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히틀러는 그런 인간선언을 할 기회가 없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처형되고 이틀 뒤인 1945년 4월 30일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미국의 압력을 받아 인간선언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히로히토뿐 아니라 히틀러 역시 우스꽝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시도했다. 그 역시 자신을 메시야로 설정했다.
▲ 추태화 이레문화연구소장은 지난 30일 일제청산연구소와 기독교미디어평화포럼 준비위원회가 하남시 초이화평교회에서 공동 주최한 월례포럼에서 <권력과 신앙: 히틀러 정권과 기독교>을 주제로 강의했다. |
ⓒ 김종성 |
안양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추태화 이레문화연구소장은 지난 30일 일제청산연구소(소장 양진우 목사)와 기독교미디어평화포럼 준비위원회가 하남시 초이화평교회에서 공동 주최한 월례포럼에서 두 제국주의 지도자의 그 같은 면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작년 11월 발행된 저서인 <권력과 신앙: 히틀러 정권과 기독교>를 강연 제목으로 삼은 추태화 전 부총장은 나치 정권이 히틀러를 예수의 지위에까지 올려놓은 사실을 설명했다. 친나치 기독교 운동인 제국기독교인 운동을 이끈 레플러 목사 등이 그런 이론을 전파했다. 책 제1권에 요약된 레플러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지도자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를 봅니다. 우리는 지도자를 위해 목사가 될 것이며 목사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 그의 투쟁과 승리는 독일민족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히틀러를 우상시한다고 비판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히틀러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로 보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독일 역사에서 구원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을 얻고 싶다면 그를 향해야 할 것입니다."
일제가 식민지 한국의 기독교를 탄압했듯이 나치 시절의 독일제국주의 역시 기독교를 억압했다.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강조한 나치는 이민족의 종교라는 등의 이유로 기독교를 경계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독교를 이용하고자 했다. 기독교가 갖고 있는 대중적 영향력을 차용하고자 '히틀러는 예수'라는 교리까지 만들어 냈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궁성요배를 강요했다. 히로히토 일왕과 그 왕실이 있는 동쪽을 향해 허리를 숙여 절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왕실을 숭배하는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같은 신사에도 참배하도록 강제했다. 또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상징하는 '가미다나'라는 신상을 집마다 비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절을 올리게 했다.
이처럼 제국주의 침략 시절에 유럽에서는 히틀러를 예수로 치켜세우고 아시아에서는 히로히토를 하느님으로 떠받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두 제국주의는 경제적·정치적으로 인류를 착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종교적·심리적 측면에서까지 고도의 착취를 시도했다.
▲ 추태화 이레문화연구소장은 지난 30일 일제청산연구소와 기독교미디어평화포럼 준비위원회가 하남시 초이화평교회에서 공동 주최한 월례포럼에서 <권력과 신앙: 히틀러 정권과 기독교>을 주제로 강의했다. |
ⓒ 김종성 |
그러던 중에 독일에서는 황당한 시도도 나왔다. 히틀러가 독신인 사실까지 이용해 예수의 이미지를 히틀러에게 덧씌우려는 시도였다. 강연에서 추 전 부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활용을 했나 하면... 놀라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결혼 안 했잖아요. 나치주의적 신학자들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결혼을 안 했다면, 히틀러는 조국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기 위해 결혼을 안 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히틀러는 사실상의 기혼자였다. 법률상의 기혼자가 아닌 점을 근거로 예수의 이미지를 차용하려 했던 것이다.
질의응답 시간에 추 전 부총장은 '독일과 일제가 범한 공통적 과오'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두 나라가 전통적인 신화나 전설을 지도자 신격화에 이용한 것과 이스라엘식 선민주의를 자기 민족에 응용한 것 등을 제시했다.
이처럼 신화나 전설을 찾아내 대중 지배에 활용하면서도 대중의 선민 의식을 부추겨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이 독일과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히틀러와 나치는 예수의 이미지를 이용하려 하면서도,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도 함께 드러냈다. 추 전 부총장은 "나치의 추종자들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몰아내고 새로운 종교를 세우려고 했다"며 "게르만 신앙, 독일적 신앙, 독일 종교, 민족신앙"을 확립하려 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이용하고 회유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탄압하고 소멸시키려 했던 것이다.
<권력과 신앙>은 친나치 기독교가 1933년에 발표한 교회법에 '아리안족 혈통이 아니거나 아리안족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목회자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긴 점을 지적한다. 나치가 종교를 얼마나 자의적으로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기독교를 포함한 식민지 한국의 종교들이 일제로부터 받은 억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일왕에게 절하기보다는 순교의 길을 택한 것은 그것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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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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