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좋았잖아"…車업계 '헤리티지' 열풍이 수상하다 [기자수첩-산업IT]

편은지 2023. 7. 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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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나도 헤리티지 앞세우는 전통 완성차 브랜드
혁신 기업 열광하자 '전통'으로 감성 어필?
후발업체 경쟁자로 인정하고 혁신으로 맞서야
벤츠의 6세대 E클래스 W210 시리즈. ⓒ메르세데스-벤츠

"이번 신차에는 과거 7세대 모델의 상징인 원형 램프를 떠올리도록 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부분으로 우리만의 헤리티지를 나타냅니다."

이달 1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11세대 벤츠 E클래스 미디어 시승행사에서 만난 토번 에우 외관 디자인 디자이너는 신형 벤츠의 외관을 설명하며 이처럼 말했다. 내년 상반기 출시될 마지막 E클래스에 그간 모델들의 헤리티지를 담아냈다는 설명이었다. 당시 행사에서는 100년 전 E클래스 1세대 모델부터 6세대까지 클래식카들을 한 자리에 모아 직접 타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벤츠 뿐 아니라 '헤리티지'를 되새기려는 노력은 마치 최근 자동차 업계의 트렌드라도 된 듯 하다. 현대차도 지난 6월 첫 양산차였던 '포니'를 기리는 전시회를 열었고, 50년 전 양산 수순을 밟지 못한 포니 쿠페를 복원해내기도 했다. TV광고는 물론 가수 잔나비와 협업해 '포니'라는 노래까지 발매하기에 이르렀다.

페라리 역시 최근 '우니베르소 페라리' 전시를 통해 역대 전설적인 모델들을 전시하면서 헤리티지를 강조했고, 기아도 최근 30년 역사를 가진 '스포티지'의 헤리티지 기념 전시를 진행했다. 한국GM 역시 강남 한복판에 '더 하우스 오브 지엠'을 개관해 GM(제너럴모터스)의 헤리티지를 고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길게는 한 세기를 넘는 '전통'이라는 단어는 소비자들의 감성을 성공적으로 건드린 모양새다. 현대차와 협업한 잔나비의 포니 뮤직 비디오 티저는 유튜브 조회수 888만회를 기록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페라리의 '우니베르소 페라리'는 판매 개시 1분 만에 티켓이 전석 매진됐다.

한번 사면 짧게는 5년, 길게는 20년도 함께한다는 '자동차'라는 내구재의 특수성은 차가 출시됐던 당시로 추억여행을 떠나게 하는 힘을 가진 듯 하다.

현대차 포니 쿠페 복원 차량. ⓒ현대자동차

하지만 자동차 업체들이 앞다퉈 전통을 강조하는 시점이 왜 하필 지금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치 헤어짐을 고한 연인에게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달라고 매달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오랜시간 헤리티지에 대한 강조 없이도 당연하게 누려왔던 기득권의 불안감이 깔려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기차로의 전환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된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테슬라, 비야디 등 신생 기업들이 그야말로 무서운 기세로 몸집을 불리고 있어서다.

역사조차 없는 신생기업들은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으며 수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잠시에 그칠 줄 알았던 인기는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다. 이제는 그들의 가격 정책에 업계 전반이 흔들리고, 전기차 인프라와의 연계성에서의 우위를 좌우하는 충전 규격마저 종속될 위기다. 내연기관 시대, '그들 만의 리그'에서 치고박고 싸우던 레거시 업체들이 갑작스런 '뉴비(신규 유저라는 의미의 게임용어)'의 등장에 아군으로 뭉쳐 혁신을 보이콧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갑자기 몸집이 커진 신생기업들을 향해 어쩌면 전통 내연기관 브랜드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견제는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전통과 역사를 내세우는 것이었을 터다. 견제할 필요가 없었다면 가벼운 무시로 일관했겠으나, 이제 신경이 쓰일 정도로 시장 내 영향력이 커진 것으로도 해석된다.

하지만, 업력이 가진 숫자가 제 아무리 대단할 지라도 완전히 변화한 생태계에서 과거의 영광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신세대에 적응하지 못한 기성세대가 "나때는"을 외치며 과거의 규칙을 내세우다 소위 '꼰대'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했던 기업이었는지'를 내세우는 것 만큼 도태되기 쉬운 길도 없다는 얘기다.

주변을 둘러보면 몇십년 째 같은 브랜드의 차만 탄다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전기차 시대에도 그간의 브랜드 충성도가 유효할까. 브랜드 로고만 같으면 전기차 시대에서도 고민없이 충성하던 브랜드를 선택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최근 1~2년 사이 너도나도 쏟아진 각 브랜드 전기차 모델들이 각 브랜드 고유의 특성을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배터리로 가는 차 특유의 비슷한 주행감과 넓어진 내부 공간은 브랜드 로고를 제외하면 모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브랜드만 가지고 선택받을 이유가 많이 흐려졌다는 의미다. 여기에 신생업체들의 참전으로 눈돌릴 만한 선택지는 너무 많아졌다.

전통에서 벗어나 '꼰대'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는 빠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에 앞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기성세대가 된 스스로를 인정하고, 듣도보도 못한 경쟁자 역시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겠다. 업력으로 단순히 낮춰 볼 것이 아니라, 이들에 대한 빠른 인정과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략 수립이 동반돼야 한다는 의미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빠른 순응과 변화가 뒷받침 된다면, 100년이 넘는 브랜드 로고의 힘은 그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노하우'라는 날개가 돼줄 수 있다. 이름만 들어도 가치가 증명되던 전통 자동차 업체들의 완전히 새로운 전략과 '꼰대스럽지 않은' 신차를 기대해본다. 기성세대라고 모두가 '꼰대'는 아니듯, 권위적인 사고를 버리고 노하우만 남긴다면 바뀐 세상에서도 큰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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