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만의 시선] 학생인권조례와 타인의 권리
한 달 전 정성국 한국교총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기자가 ‘논설위원이 간다’에서 교권추락의 실태와 대안을 상세히 보도한 직후였다. “현실은 더욱 심각해요. 학교는 질서가 무너져버린 아노미 상태입니다. 버티지 못하는 교사들도 많아요. 이렇게 놔두면 큰일이 날까 두렵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서울의 한 초등학교 20대 교사가 극단 선택을 했다. 부임한 지 1년여밖에 되지 않은 새내기 선생님이었다. 서울교사노조는 이 교사가 지나친 학부모 민원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숨지기 며칠 전 쓴 일기장에선 “○○○ 난리가 겹치며 모든 게 버거워지고 놓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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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권침해 13년 새 2.2배 급증
‘교사억압, 학생해방’ 대립구도
시민적 책무도 함께 가르쳐야
」
이슈가 커지자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쏟아냈다. 윤석열 대통령도 “교권 강화를 위한 고시를 마련하고 교권을 침해하는 불합리한 자치조례를 개정하라”고 주문했다. 국회도 무분별한 민원 방지, 학생부에 교권침해 사실 기재 등 법안 논의를 이어갔다.
그러나 교권추락이 어제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2012년 이명박 정부는 교권보호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교권보호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했다. 2019년 문재인 정부는 교원지위법을 개정해 중대한 교권 침해가 발생하면 교육청이 고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런데도 교권침해는 계속 증가했다. 교총에 따르면 2009년 237건에서 2022년 520건으로 늘었다. 지난해 7월 정성국 회장의 취임 일성도 교권회복이었다. 그는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학교와 소신있게 가르쳐도 아동학대로 항의받는 선생님들을 위한 입법활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뜻대로 지난 6월부터는 교사의 생활지도 권한을 명시한 초중등교육법(20조 2항)이 발효됐다.
지난 10년간 각종 정책과 입법이 있었지만 교권이 계속 떨어진 이유는 뭘까. 근본 원인에는 교사와 학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선생님은 지식과 권위를 인정받았고, 학교는 단순 학습만이 아니라 인성 함양을 포함한 전인교육의 장이었다. 일부의 과도한 폭력은 문제였지만, 일정 부분 ‘사랑의 매’도 통용됐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인터넷 지식의 범람과 사교육의 거대 산업화로 교사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학교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도 달라졌다. 여기에 진보교육감이 밀어붙인 학생인권조례가 학교 질서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조문 자체에도 문제가 있지만, 당시 인권조례 열풍으로 생겨난 ‘교사의 억압 vs 학생의 해방’이라는 대결구도가 아노미를 부추겼다.
지난 25~26일 교총이 교사 3만여 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4.1%는 인권조례가 교권추락에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인권조례 실시 후 교실의 분위기가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적 자유(liberty) 대신 개인의 자유(freedom)를 오인한 방종이 많아졌다.
공동체의 책임과 의무를 배울 기회가 없어지자 평범한 다수의 학생도 피해를 봤다. 일부 학생의 소란으로 교실 분위기는 엉망이 됐고, 무분별한 아동학대방지법 신고로 교사들이 생활지도에 손을 놓으며 무질서는 더욱 커졌다. 인성·시민교육이 부재하니 악순환은 계속됐다.
요즘 20~30대 교사들은 아예 생활지도를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전인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성숙한 어른으로 만드는 스승이 되기보다(성직관) 지식 근로자 또는 전문가로서 역할을 한정하는 게(노동·전문직관) 합리적 선택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번 사건 같은 일이 벌어지면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할 것이다.
해법은 무엇일까.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처럼 교사의 생활지도는 아동학대로 보지 않는다는 면책 조항을 제정하거나, 학부모의 무분별한 민원에 제동을 거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교실에 CCTV를 설치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 해결책은 적대 구도에 놓인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선 학생인권조례 대신 교사를 포함한 모든 학교 구성원이 존중받을 수 있는 학교조례를 만들어야 한다. 학생들이 올바른 사회구성원으로서 성장해 나가는 데 필요한 책임과 규율, 의무를 체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인권조례가 약자일 수밖에 없던 아이들의 권리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젠 다음 단계로 올라갈 때가 됐다. 성숙한 권리의 토대는 ‘프리덤(freedom)’만이 아니라 ‘리버티(liberty)’라는 점을 가르쳐야 한다. 이걸 모른 채 성인이 된다면, 선진국가 시민이 될 자격이 없다.
윤석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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